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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문학기행] 영혼의 옆구리를 만져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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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13 01:02:42 수정 : 2017-01-13 01: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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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완전한 갑도 을도 없는 것 같아 / 내말 들어줄 애틋한 사람 있는 게 행복
흙수저와 금수저의 날카로운 구분에 설움을 느끼는 사람이 부쩍 많아진 요즘이다. 갑을관계의 감정노동에 지친 이들이 돈보다는 마음의 평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도 잦아졌다. 재벌 자제들의 갑질 논란으로 세상이 시끄러운 요즘, 사실 주변을 둘러보면 완전한 갑도 완전한 을도 없는 것 같다. 번쩍이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때로는 을도 되고 때로는 갑도 된다. 고용주의 눈치를 볼 땐 영락없는 ‘을’이지만, 물건을 살 때나 다양한 서비스를 받을 때는 ‘갑’ 행세를 하는 이들도 있다. 상사 앞에서는 꼼짝 못하면서,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대뜸 반말부터 던지는 이들도 있다. ‘갑의 자리’에 있을 때조차도 얼마나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가, 바로 그것이 한 사람의 진짜 인간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아닐까.

김장호의 시 ‘나는 을이다’를 읽으며, 어쩌면 ‘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더욱 넓고 깊게 바라보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겨 본다. “나는 을(乙)이다. 항상 부탁하며 살아가는/(…)/당신은 넘볼 수 없는 성체의 성주/당신 앞에 서면 한없이 낮아진다네/나를 사준다는 보장은 없지만/당신 눈도장 찍느라 하루해가 모자라네/(…)/그래도 한밤중에 목말라 자리끼를 찾다가/내 영혼의 옆구리를 한 번 만져본다네.” 항상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며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자존심도 구겨 넣고, 자존감도 숨겨두고, ‘나’라는 주어보다는 ‘여러분’을 위한 삶에 집중하게 된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자리끼를 찾다가 문득 내 영혼의 옆구리를 만져보는 시간. 그때가 바로 갑도 을도 아닌 나, 진정한 나 자신의 민얼굴을 만나는 시간이 아닐까. 

정여울 작가
김희정 시인의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에는 이 땅에서 아버지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가슴 시린 문장으로 그려져 있다.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너희들이 태어나고, 제일 먼저/그림자를 버렸단다/사람들은 아빠보고 유령이라 말하지만/너희들이 아빠라고 불러줄 때마다/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단다/다음으로 버린 것은 남자라는 단어야/폼 잡았던 남자라는 옷 벗어 던지고/너희들이 달아 준 이름/아빠를 달고 세상을 향해 걷고 또 걷는단다/(…)/다음은 지갑을 닫았단다/멋진 폼으로 친구들 앞에서/지갑을 열었던 날이 있었지/네가 태어났던 날이야/그날을 끝으로/먼저 지갑을 꺼내 본 적이 없단다/망설이다 망설이다, 버린 것이 자존심이야/너무나 버리기가 힘들어/마음 한 구석에 숨겨놓았지/(…)/지갑이 없다고 수군거려도/배알이 없다는 말로/심장에 비수를 꽂아도/나는 너희들의 아빠니까, 괜찮아/아빠니까 말이야.”

‘저 사람은 지갑이 없다’고 수군거려도, ‘배알도 없다’는 말로 심장에 비수를 꽂아도, ‘나는 괜찮다’고 느끼는 아빠의 마음. 그것이 오늘도 힘겹게 을의 자리에서 하루를 견딘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그리하여 진짜 불행한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지켜야 할 사람, 사랑할 사람, ‘아무리 힘들어도 언제나 내 편’인 사람이 없는 이들이 아닐까.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구석진 을의 자리로 밀어붙이더라도,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라고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애틋한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을도 흙수저도 아닌, ‘행복한 사람들’이니까.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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