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등 범법적 조약체결 과정 추적
무력 동원에 문서 위조까지 드러나
일제 침략·병합의 역사 철저히 은폐
오늘날까지 ‘반성하지 않는 일본’ 만들어
이태진 지음/지식산업사/3만원 |
1905년 11월 16일, 일본 한국주차군(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이근택 군부대신을 일본공사관으로 초치했다. 이근택은 황망히 공사관으로 내달렸다. 하세가와가 이근택에 한 말은 완전 협박조였다. “나는 이 조약의 통과에 대해 특별히 노력해야 하는 훈령을 받고 있어서, 내가 최후로 집행할 수단이 어디에 있는지는 감히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나와 경은 경성에 있는 양국 최고 무직(武職)의 지위로서, 한 조각의 우의로 미리 알리지 않을 수 없으니 경은 이를 잘 헤아리라. (중략)” 이에 이근택은 전율창황했다고 한다. ‘최후 집행 수단’이 무엇이었길래 이근택이 벌벌 떨었을까. 이는 같은 날 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가 외부대신 박제순을 공사관으로 불러 외교권 찬탈을 담은 ‘을사늑약’을 전달하면서 했던 말에 답이 있다. 하야시는 일본 군대가 경복궁을 포위하고 한양 도성을 완전 점령했다는 말을 했다.
이 내용은 1911년 일본 육군성이 편찬한 10권짜리 극비 보고서 ‘육군정사’(陸軍政史)에 기록돼 있다. 육군정사는 일본에서 1983년 복제본이 간행됐으나, 국내학계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문서다.
첫번째 사진▶ 일본 군부가 러일전쟁과 한국 외교권 찬탈 과정 등을 정리한 극비 문서 ‘육군정사’의 표지. 이 문서들은 1985년 일본 쇼난도서점이 전 10권으로 출간했는데, 저자가 소장하고 있다. 지식산업사 제공 세번째 사진▶ 이태진 명예교수는 1905년 11월 17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외부대신 박제순이 교환한 한일협약(을사늑약)의 마지막 장인 한국어본(가운데)과 일어본을 공개했다. |
이 명예교수가 특히 주목한 기록은 ‘육군정사’다. 여기에는 하세가와가 본국에 보낸 ‘보고’가 있다. 찬탈 과정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보고는 하세가와 자신이 대본영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훈령에서 시작한다. 하세가와는 보고 머리에 “훈령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 대사 및 하야시 공사를 도와 한국 조정에 제출할 보호조약의 통과를 도모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11월 18일 오전 1시 이 조약에 대한 조인을 완료하여, 지금 그 전후의 개황을 서술하여 임무 완료의 보고로 삼는다”고 적었다. 11월 28일자로 작성한 보고서다. 이는 미국 컬럼비아대 귀중자료실에서 발견된 문서들 내용과 일치한다. 이들 문서에는 고종이 호머 헐버트 미국 선교사에게 “자신은 절대 사인하지 않았다”고 밝힌 내용이 적혀있다.
이 명예교수는 현대 일본인이 “지금도 일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데는 유명 역사 소설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현대 일본인의 역사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이다. 이 소설은 러일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투인 뤼순 공략, 쓰시마 해전에서 공을 세운 두 형제의 애국 보훈의 정신을 그렸다. 메이지 일본의 영광을 일본인들의 뇌리에 깊이 심어 준 소설이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인들에게 세계 일등국이란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에는 이 전쟁의 싸움터가 되고 전쟁의 노획물인 한국은 없었다. 전쟁의 진정한 목표였던 한국 침략과 병합의 역사는 은폐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양심적 학자로 유명한 도쿄대 와다 하루키 명예 교수는 역작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상·하’(2009년 12월, 2010년 2월)를 통해 시바의 소설과 일본인의 역사 인식을 통렬히 비판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