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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칼럼] 블랙리스트, 독재의 망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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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17 21:57:35 수정 : 2017-01-17 21:5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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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시대착오적 야만 실상 밝히고
이 시대 아이히만들 단죄해
블랙리스트 백서 만들어야
지난해 영화감독인 친구가 만든 영화가 개봉됐다. 상영관이 몇 곳 되지 않았고 그나마 상영 시간대가 오전 또는 한밤 중이었다. 다행히 집 부근 영화관에서 상영해 오랜만에 조조영화 관람을 했다. 분위기는 썰렁했지만 친구의 취향이 묻어나는 고급문화를 접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게 알려졌다.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계 인사 약 1만명의 리스트를 만들고 이들에게는 정부 지원을 배제했다는 것이다. 친구 이름도 올라 있다. 영화 개봉과 연관지어 보니 심사가 뒤틀린다. 저예산 영화여서 주목받지 못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친구는 “모든 문화예술인이 피해의식을 갖게 한 시대착오적 야만”이라고 했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블랙리스트의 사전적 의미는 ‘감시가 필요한 위험 인물들의 명단’이다. 태어나서 청년기까지 군부 독재를 경험한 우리 세대는 블랙리스트에 대한 기억이 남다르다. 여러 분야에 수많은 블랙리스트가 있었다. 지식인이건 공장 노동자건 정권의 눈밖에 나면 여기에 이름이 올라 감시를 받고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이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블랙리스트를 만들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기준조차 모호하다. 상당수는 야당 정치인 지지나 시국선언에 참여했다고 해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작가 한강은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소설을 쓴 게 이유였고, 그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대통령이 축전 보내길 거절했다고 한다. 한강은 한 강좌에서 “소설을 쓸 때 가끔 자기검열을 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뒤늦게 그런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안쓰럽다.

자유로운 창작이 생명인 문화예술계에 블랙리스트를 내민 것이야말로 국정농단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몰상식한 모리배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나라의 근본을 흐트러뜨렸다. 헌법에 명시된 ‘언론·출판의 자유’와 ‘학문·예술의 자유’를 침해하고 국민을 탄압했다.

어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을 주도한 혐의로 특검에 소환됐다. 조 장관은 국회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에서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마지못해 시인하면서 자신은 작성·실행과 무관하고 리스트에 오른 인사 중 770여명은 정부 지원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비겁하고 용렬하다. 이러니 문체부가 블랙리스트에 휘말려 존폐의 위기에 몰린 것이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른 공무원들 역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의 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스스로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닫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블랙리스트를 실행하려면 실무자들이 공유해야 하고 언젠가 문제가 터지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그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국정 시스템에 이상이 있다는 징후다.

국민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를 원한다. 국기를 뒤흔든 블랙리스트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 특검 조사 결과 미진한 게 있다면 별도의 국회 국정조사특위를 구성해 청문회를 열어서라도 소상히 밝혀야 한다. 조 장관은 청문회에서 18번이나 같은 질문이 반복되자 블랙리스트 존재를 시인했다.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을 모두 불러 수십번 같은 질문을 해서라도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블랙리스트가 민간부문의 지원에 영향을 미쳤는지, 교육계·체육계 등 다른 분야에 블랙리스트가 있는지도 밝혀내야 할 과제다. 블랙리스트 작성·실행 관련자들에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결과를 모아 블랙리스트 백서를 만들어 후대에 남겨야 할 것이다.

국민이 자신도 모르게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온갖 불이익을 당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 나라에서 다시는 블랙리스트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검열이라는 수치스러운 말도 사라질 것이다. 나라가 바로 서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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