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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문화재] 아픈 역사… 정읍 화호리 일본인 쌀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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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19 01:13:05 수정 : 2017-01-19 01: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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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우리가 또 한 해를 맞이했듯이 이 땅의 도시와 마을의 역사도 어김없이 흐르고 있다. 수많은 도시 중 전라북도의 소도시 정읍은 근현대 시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사의 중심지다. 조선 말기 최익현, 임병찬 등 의병장들의 일제 항거에서 광복 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 박사의 ‘정읍발언’(1946)에 이르기까지 이 작은 도시가 역사적으로 부상한 시기는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뼈아픈 기억은 부안과 김제로 이어지는 넓은 농경지로 인해 식민지 수탈의 중심지였고 여전히 그 현장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신태인읍 화호리는 마을 곳곳에 일제시기 시설물과 현 거주민들의 건물이 혼재되어 독특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당시 지어진 건물은 일본인 가옥이나 별장, 창고, 사무실, 합숙소 등이다.

화호리에 일본식 시설이 들어선 배경과 연관이 깊은 인물은 오사카 출신 고리대금업자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이다. 그는 곡물 생산이 풍부했던 이곳에 1920년대 안착하여 많은 전답을 구입했고 5채가 넘는 쌀 창고와 살림집, 농장을 운영하는 등 자신만의 왕국을 건립했다. 그가 수탈한 조선인의 피와 땀으로 지은 미곡창고는 자신의 가옥(등록문화재 제215호)과 더불어 화호리를 대표하는 식민지 시기 건물이다(사진). 약 990㎡ 내외의 큰 면적과 높게 설치된 계단, 두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삼각 아치형 지붕은 제국주의 건축양식의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창고는 광복 후 병원과 마을학교로, 공연장으로 쓰이다 폐허가 되었지만 다다미마루, 병원 휘장, 만국기 등이 기록 대신 흔적으로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한말 의병들의 활동지로, 일제 수탈지로, 근대 의료의 현장으로, 정치적 행보의 중심지로, 100여년 동안 화호리가 겪은 격동의 시간은, 내용은 다르지만 지금도 진행형이다.

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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