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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대북관 국운 좌우… 남북문제, 제재만으론 못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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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21 21:00:00 수정 : 2017-01-21 15: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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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통일부 장관… 정세현 한반도평화포럼 대표 “태어나 130일쯤 지난 갓난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평양역에 도착했으니 아마 남한 사람 중에 최연소 평양역에 도착한 사람일 거요. 흑룡강성 자무스에서 태어난 지 101일째에 출발했으니….”

1945년생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생사를 넘나들었던 갓난아이 시절의 귀국 여정을 풀어놓았다. 인터뷰는 19일 서울 서초동 정 전 장관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정 전 장관은 “당시 자무스를 떠나 단둥까지 와서 국경이 막히자 한밤중에 강을 건너 신의주(조선)로 들어왔어요. 걷고 걸어 평양역에 도착해 이틀을 꼬박 기다린 뒤 피란민 행렬에 끼여 열차를 탔고, 가까스로 38선을 넘어 서울을 거쳐 전주까지 왔으니 북만주에서 고향 오는 데 40일이나 걸렸다”고 회고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최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북한을 어떻게 보는가는 한반도 운명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친다”면서 대통령 대북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남제현 기자
-만주로 건너간 이유는.


“당시 광활한 땅의 만주는 조선사람에게 희망의 땅이었다. 건강하게 일하면 밥은 굶지 않았다. 당시 조선에서는 농사지으면 쌀은 대부분 공출(일제)로 빼앗겼고, 대신 만주에서 들여온 콩을 배급했다. 조선은 지주의 땅이었다. 일제 말기인 조선은 정말 살기가 팍팍했다. 모두들 살길을 찾아 만주나 간도 땅으로 이주했다. 20대 초반인 선친께서는 전북 장수에서 한의사로 가업을 이어가던 중이었는데, 만주행을 택했다. 만주에서 그런대로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내가 만주에서 태어났다.”

-그런데도 부친께서 고향에 돌아온 이유는.

“고향 가봐야 희망도 없다며 안 간다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도 선친께서는 한의사였기에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이고, 해방되었으니 환국을 결심하신 것이다. 아마 그때 안 나왔으면 조선족(중국인)이 됐을 것이고, 잘해봐야 교수나 공무원을 했을 것이다.”

-환국을 결단한 게 다행이었나.

“부친께서 20대 젊은 나이였으니 가능했었다. 고종 형님과 모친 등 6명의 식구를 이끌고 40일이나 걸려 북만주에서 정착지인 임실군 오수면까지 왔다. 고향에 당도해 보니 거지 같은 행색, 노숙자 행색 그대로였다. 당시 38선이 갈라져 길이 막혔는데, 돈 받고 넘겨주는 사람이 있어서 남한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가다 멈추면 짊어지고 온 이불을 덮고 노숙했다. 동행한 식구들 대부분 병을 앓았지만 나와 부친만 건강했다.”

-환국 도중 죽을 고비도 많았을 텐데.

“해방 직후 북한 땅을 점령한 소련군은 열차가 지나가면 무조건 차를 세우고 착검한 채 열차 칸에 올라 모조리 빼앗아갔다. 부친 말에 따르면 거의 도적떼였다. 시계는 모두 빼앗고 젊은 여자는 무조건 끌고 갔다고 한다. 젊은 여자들은 잡히지 않으려고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얼굴에 흙을 발라 위기를 모면했으며, 아이가 놀라 울면 무조건 검으로 찔렀다. 아기 울음소리를 싫어했다고 한다. 나는 그때 울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는데, 갓난아이나 어린아이들이 소련군 총검에 많이 죽었다고 들었다. 지금 인터뷰도 그때 목숨을 건졌기에 가능했다. 운이 좋다고 해야지. 열차 칸에는 중국 비적들도 많이 탔는데 소련군은 조선사람에게 더 험하게 굴었다. 일본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은 죄수들에게 군복을 입혀 조선으로 파병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마 정규군이었으면 그런 무지막지한 노략질은 안 했을 것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오른쪽)과 북한 김령성 내각책임참사가 지난 2002년 8월 남북장관급회담장인 신라호텔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평양에 다시 갔을 때 감회가 새로웠을 것인데.


“2002년 11월 장관급 회담 차 평양에 갔었다. 그때 묵은 호텔이 평양 고려호텔이었다. 창 밖을 보면 평양역이 온전히 내려다보였다. 백일 막 지나 평양역 앞에서 이틀을 보냈다는 선친의 말이 떠올랐다. 참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태어나 130일 정도 지난 아기가 남행열차를 타기 위해 평양역전에서 노숙했다니 기가 막혔다.”

-지금 평양 쪽과는 연락선이 있는가.

“이미 상당 기간 왕래가 끊겼으니 거의 북쪽 얘기를 들을 수 없다. 베이징에 학술회의 갈 때마다 중국학자들을 통해 평양 소식을 듣는다. 현재 북한은 유엔 제재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 돌아간다고 한다. 압박과 제재로 (북한이) 붕괴한다는데, 중국 전문가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작년 두만강 지역 대규모 수해 피해에도 불구하고 농사가 잘되었다고 한다. 북한에게 매년 600만t 정도의 식량이 필요한데, 572만t을 수확했다고 한다. 28만t 정도가 부족한 실정이다. 김대중, 노무현정부 시절엔 매년 200만t 내지 150만t이 부족했다. 당시 남한에서 보내준 쌀 50만t과 비료 30만t(식량 90만t 생산)으로 메꿔졌으니 그런대로 우리말을 잘들었다.”

-북한 경제가 좋아졌다는 얘기인가.

“덩샤오핑 시대 중국의 식량 해결 방식은 농가 책임생산제였다. 책임농사, 즉 일정 부분 소출은 국가에 주고 나머지는 본인이 갖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1880년대 중반 식량문제가 해결되었다. 지금 북한에서 적극 추진하고 있는 분조관리제가 이런 식이다. 국가에 세금을 내고 남은 식량을 장마당에 가서 팔아 생활에 보탠다. 박봉주 내각 당시 이런 식의 시장경제 논리를 일부 적용했다. 2002년 장성택이 경제사절단을 끌고 왔을 당시 동행한 박봉주는 화학공업상이었다. 이런 인센티브 덕분에 경제가 돌아가는 것 같다. 훗날 박봉주는 극좌로 비판받아 함경남도 비날론공장 책임자로 좌천됐다가 2012년 다시 총리로 복직, 분조관리제를 시행하면서 북한 경제가 풀려나가는 걸로 듣고 있다.”

-사드 배치 논란을 어떻게 보는가.

“미국 군산복합체 입장에서 보면 무역으로 돈벌기보다는 무기 시장을 넓혀 나가는 게 더 쉽다. 명중률 높은 고성능 무기를 생산하는 기업체 입장에선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백악관이나 국무부 입장은 다르다. 실제 전쟁이 벌어지면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니 평화적인 분위기로 기울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 있는 한국의 대통령이 어떤 태도를 갖느냐가 중요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은 군산복합체에 유리한 정책을 끌고 가지 않고 우리의 운신 폭을 넓히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통일 전문가로 이름을 얻게 된 계기는.


“분단국 입장에서 대통령의 대북관은 우리의 운명에 큰 영향을 준다.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북관을 보면 그들은 군 출신이기에 일단 방비를 튼튼히 해 다시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아래, 상대방의 의중을 탐색하는 남북회담을 추진했다. 박정희 역시 대결하고 또 한편으론 회담을 하면서 상대방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감잡는다고 했다. 남북회담은 북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해주면서 우리를 좋아하도록 조성하는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적대적이다. 붕괴론을 믿고 있었다. 김영삼정부 시절 청와대 통일비서관을 지냈는데 대통령의 대북관이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다. 김대중정부 시절엔 차관에 기용됐는데 무슨 맘으로 정적의 비서관을 기용했느냐고 여쭤보고 싶었지만 돌아가셨다(웃음).”

-전라도 출신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1977년부터 통일부에 몸담고 있었으니 통일부 관료로서 실무적인 감각을 평가했던 것 같다. 호남 출신이라 해서 기용됐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만주 출신이다(웃음).”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무언가를 했을 텐데.

“유엔을 통해 무언가 역할을 할 것으로 국민은 기대했다. 10년 (재직)했는데, 2006년부터 10년간은 북핵문제가 꼬여가는 시점이었다. 미국 대북정책이 적대적인 시대였다. 유엔은 미국 의도대로 움직이는 기구다. 케냐 출신 코피 아난 경우를 보자. 이집트 출신 부트로스 갈리가 연임하려 하자 미국은 코피 아난을 선택했다. 갈리는 미국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코피 아난은 미 국무부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압박 견제라는 미국 대북정책 하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반 전 총장은 막판에 북에 가려고 했는데.

“북한 입장에서는 남조선 유엔 사무총장이 나왔다는 것은 자존심 문제다. 남쪽에 밀렸다는 얘기를 제일 싫어한다. 북한 지도부엔 대단히 아픈 부분이다. 반 전 총장이 개성공단을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북은) 항상 상황 전개 직전에 무언가 꼬투리를 잡는다. 개성공단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불가 통보를 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반 전 총장이 남쪽 출신이라는 사실이 북 주민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 것이다.”

-대학 총장을 하셨다. 젊은이들에게 당부할 말은.

“솔직히 말해 보자. 지방 학생들은 수도권 대학에 진학하는 게 로망이다. 지방 대학에 주저앉았다고 루저라는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는데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나 역시 폐병에 걸려 대학을 못 가 인생을 비관하기도 했다. 용케도 살아나 겨우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루저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리더가 되면 꼭 무슨 사고가 난다. 전직 대통령을 지낸 한 분은 본인이 야간학교를 다닌 루저 출신인데도 루저를 보살피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루저 출신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 정세현 한반도평화포럼 대표는…?

△1945년 6월 중국 흑룡강성 출생 △서울대 문리대 졸업 △세종연구소 기조실장 △민족통일연구원 원장 △대통령비서실 통일비서관(김영삼정부) △통일부 장관, 차관(김대중, 노무현 정부) △이화여대 석좌교수 △원광대 총장 △2015년 10월부터 한반도평화포럼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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