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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을 기리며] “책은 시간의 예술” 늘 반 박자 앞서간 출판계의 개척자

입력 : 2017-01-22 21:00:02 수정 : 2017-01-22 21: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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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맹호 민음사 회장
‘한국 출판계의 거목’ 박맹호 민음사 회장이 22일 0시 4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전후 열악한 출판 현실에서 한국문학을 독자들에게 가깝게 인도하고 단행본 시장을 활성화시킨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출판계 리더로도 활동하면서 한국 출판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그가 한국 출판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이유다.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를 나와 한동안 소설가를 꿈꾸었지만, ‘문학이란 천재들의 장르’라는 판단을 하고 일찌감치 출판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는 사실에 대해 그는 “평생 내린 최고의 선택 중 하나”라고 후일 스스로 대견해했다. 그는 일찍이 한국일보 1회 신춘문예 단편소설 최종심에 올랐다가 자유당 정부를 풍자한 연유로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장편소설도 썼고 이른바 ‘문학청년’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배회했지만, 그는 결국 출판인의 길을 작심했다. 1966년 ‘민음사’를 설립해, 당시 유행하던 번역서 제작과 방문판매에 휘둘리다가 1970년대 벽두부터 한국문학을 단행본으로 판매하는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다.

먼저 시집은 전문 독자나 읽는다는 편견을 깼다. 원문을 병기해 신뢰를 받은 폴 발레리와 보들레르 등의 ‘세계시인총서’를 내고, 김수영 김춘수 천상병 고은 박재삼 황동규로 이어지는 ‘오늘의 시인총서’를 기획해 오늘날 시의 대중화를 이끄는 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과 함께 삼각 정립을 형성한 문예지시대를 ‘세계의 문학’을 창간해 이어갔다. 김우창 유종호 등 당대의 대표적 지성이 이끈 이 문예지를 통해 ‘오늘의 작가상’을 신설해 한수산 ‘부초’, 박영한 ‘머나먼 쏭바강’, 이문열 ‘사람의 아들’로 이어지는 장편의 시대를 열면서 이른바 본격문학도 얼마든지 대중들과 넓게 호흡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문단 내외에 심어주었다.

이와 함께 ‘대우학술총서’를 오래 발간하면서 인문학의 대중화도 함께 선도했다. 아울러 북디자인의 새로운 경지 개척에도 기여했다. 한국 북디자이너 첫 세대인 정병규씨를 발굴해 해외 유학까지 지원하면서 새로운 책의 디자인과 아름다운 질감을 창조하는 역할을 적극 지원했다. 그가 말년에 낸 자서전 ‘책’의 표지 디자인도 정씨의 작품이다. 출판문화운동을 이끈 것도 그의 빼놓을 수 없는 족적 중 하나다. 한국 출판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출판인 모임 ‘수요회’를 견인하면서 1980년대 암울한 환경에서 ‘출판인 17인 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정부와 불화를 겪으면서 세무 사찰을 받아 그의 출판사가 존폐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출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좇아 전문 편집자 시대를 열고 아동출판을 전담하는 ‘비룡소’를 비롯해 ‘황금가지’ ‘사이언스북스’ ‘민음인’ 등을 꾸려가며 다변화시대를 열었다. 서울대 민음 인문학기금을 만들었고 ‘거실을 서재로’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소설가 이문열은 “이 나라 지식산업계의 거인으로 우리 시대 문화에 깊이와 무게를 더해 온 분”이라고 평가했고,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맹장이자 덕장이었던 출판계 선배”라고 고인을 기렸다. 평소 출판은 “반 박자 앞서야 하는 시간의 예술”이라고 강조했던 고인은 그의 자서전 말미에 이렇게 쓰고 갔다.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에 화살처럼 달아난다. 그 호랑이 꼬리를 붙들고 함께 달려야 하는데, 그걸 놓치면 후회할 수밖에 없다. …호랑이 꼬리가 다시 저만치 달아났다.”

유족으로는 부인 위은숙씨와 상희(비룡소 대표이사), 근섭(민음사 대표이사), 상준(사이언스북스 대표이사)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 24일 오전 6시.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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