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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남쪽에선 벌써 매화 소식이 들리기 시작한다. 본격 매화철은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 한때는 봄을 미리 맞으러 남쪽에 내려가 매화 향기를 마셔야 비로소 한 해가 시작되는 걸 체감하곤 했다. 청매의 알싸한 향은 다시 삶이, 생명이 시작된다는 징표로 다가왔다. 매향 중독도 있을까. 어느 해인가 벗들과 함께 섬진강 매화 마을에 갔다가 미처 피지 못한 꽃들 때문에 실망한 적이 있다. 햇볕이 잘 드는 저지대 강변 쪽은 드문드문 피어 있는 나무들도 보이긴 했다. 그곳에서 그 귀한 매화를 따가는 도둑을 만난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날 섬진강에서 돌아와 이런 기록을 남겼다.

매화를 찾아 섬진강에 왔다. 매년 이맘때면 매화로 하얀 구름동산을 이루는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청매실 농장 언덕은 아직 황량하다. 청매실 농장의 어두운 나무 빛깔은 아직 희망 없는 황량함은 아니다. 매화나무에 가까이 다가가 작은 꽃망울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세상에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꽃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며칠만 더 햇볕을 받으면 녀석들은 우루루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밀 것이다.

겨울과 봄 사이 미리 피는 꽃은 자신의 존재를 더 적극적으로 벌과 새에게 알려야만 한다. 그래서 추울 때 피는 꽃일수록 향은 더 강하게 마련이다. 매화 입장에서 보면 인간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암향 속에서 폐부에 스미는 서늘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이란, 아무리 매화가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향이라 하더라도 이 풍진 세상 인간들 가슴에 켜켜이 쌓인 진애(塵埃)를 정화하기 위한 신의 배려로 여길 만하다.

한적한 강변의 매화나무 가지 사이로 사내 두 명이 보인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들은 일찍 핀 매화 송이들을 따서 검은 비닐봉지 안에 포획하는 중이다. 매화 도둑이다. 어렵게 갓 피어난 매화 송이를 독식하려는 탐심이 언짢다. 가까이 다가가 마뜩잖은 표정을 짓자 사내 중 한 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집에 누워 있는 노인네가 오늘내일 하는데, 올봄 매향이나 맡고 가게 하려고 내려왔더니 피어 있는 꽃이라곤 여기밖에 없네요.”

석양 무렵 매화 가지가 사내의 어두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매화는 떨어지고 매우(梅雨) 속에 매실을 맺겠지만, 내년 봄이면 다시 피겠지만, 인간의 육신은 죽으면 악취만 풍긴다. 매화 도둑의 노모는 매향 속에 아름다운 꿈을 꾸다 암향 속으로 사라지기를. 그때까지 부디 살아 있기를.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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