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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1942∼)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은 동해안에 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바다

거기 하나의 암호처럼 서 있습니다. 아무도 가 본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이 거기 닿을 때, 그 역은 총에 맞아 경련합니다. 경련 오오 존재.

커다란 하나의 돌이 파묻힐 때, 물들은 몸부림칩니다.

물들의 연소 속에 당신도 당신의 몸부림을 봅니다.

존재는 끝끝내 몸부림 속에 있습니다.

아무도 가 본 사람은 없습니다.

푸른 파편처럼, 바람 부는 밤에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이 보입니다.


한국에서 시학(詩學)을 가르치는 학자를 진보 시학자와 보수 시학자로 구분할 수 있다면 이승훈 선생은 진보 시학자 중에서도 늘 선봉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선생이 쓰는 시가 그랬고, 가르치고 소개하는 시 이론이 그랬고, 배출시키는 시인들이 그랬다. 이중에서도 지칠 줄 모르는 전위적 시 이론 연구와 주장은 단연 압권이었다. 또한 증명이라도 하듯 이에 걸맞은 신인들(박상순, 함기석, 이수명 등)을 발굴한 실적은 선생의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하고도 남는다. 선생이 주장하는 시학을 요약하면 “시란 결국 없는 것이고 쓰는 행위만 있다”는 것인데, 20년 이상 시를 공부하고 쓰다 보니 필자도 선생의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


김영남 시인
인용시 ‘암호’는 선생의 개성이 잘 반영되었다. 선생이 좋아하는 선(禪)적인 표현을 빌리면 “이해되는 것도 없고 이해 안 되는 것도 없다”. 어떤 내용을 지으려는 의식에 기댄 게 아니라 환상이라는 무의식에 의존해 서술했기 때문에 전체 내용을 파악한다는 건 어렵지만 한줄 한줄 떼어내 따로 음미하면 이해가 되고 멋진 표현들도 눈에 들어온다.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은 동해안에 있습니다” “존재는 끝끝내 몸부림 속에 있습니다” “바람 부는 밤에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이 보입니다” 등.

김영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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