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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소복이 둘러쳐진 항아리 담장… 격의없이 열린 선조들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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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2-16 10:00:00 수정 : 2017-02-15 19: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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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서인 세력의 중심 충남 논산
충남 논산 명재고택은 소론의 거두 윤증의 호를 딴 한옥으로, 그의 제자들이 갹출해 건립했다. 명재고택에는 으리으리한 문도, 경계를 나누는 담도 없다.
두 권문세가가 왕을 가운데 두고 치열한 다툼을 벌인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면 권력을 가지고 패하면 밀려나 낙향하거나 오랫동안 엎드려 지내야한다. 이어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집안도 둘로 쪼개지게 된다. 뜻을 같이했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은 동지도 멀어지게 만든다. 결국 둘로 쪼개진 권력은 다시 한쪽이 힘을 잃을 때까지 정쟁을 벌인다. 권력을 움켜쥐기 위한 욕심으로 인한 다툼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여지없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잘 알려진 권력 다툼을 꼽자면 조선시대 영남을 중심으로 한 남인과 충청, 경기 지역 서인의 예송논쟁, 그 이후 권력을 잡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쪼개져 벌인 정쟁 등 붕당 정치가 대표적이다. 직접 칼을 들진 않았다. 하지만 허약한 왕권을 이용해 상대 세력을 철저히 배척했다. 조선 중기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서인과 노론, 소론 세력의 중심이 바로 충남 논산이다.
이 세력의 흔적은 논산에 있는 고택과 서원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한창 세력을 잡았을 당시 문턱이 닳도록 사람들이 오갔을 논산의 고택과 서원은 당시의 위세를 알 수 있게 다른 지역의 서원보다 크고, 색다른 건축 양식을 품고 있다. 겨울의 고즈넉한 한옥 여행을 생각한다면 논산의 고택이 제격이다. 역사의 한 획이 같이 새겨질 것이다.
논산 돈암서원은 예학의 체계를 세운 서인 김장생과 아들 김집, 제자 송시열, 송준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서인 김장생을 위해 지어진 돈암서원이지만, 송시열 이후 노론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서인과 노론계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돈암서원(遯巖書院)’이다. 예학의 체계를 세운 서인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김장생 타계 3년 후인 인조 12년(1634년)에 세워졌다. 애초 돈암서원은 현재 위치에서 1.5㎞ 정도 떨어진 연산면 숲말 산기슭에 세워졌는데 그곳의 돈암(돼지바위)에서 이름을 따왔다. 하지만 서원에 ‘돼지 돈(豚)’을 쓸 수가 없어 ‘물러날 둔(遯)’자를 썼다.
돈암서원은 애초 있던 곳이 지대가 낮아 홍수 때 물이 범람해 고종 때 현 위치로 옮겨졌다. 당시 위패를 모신 사당과 학생들이 머무는 동재, 서재 등은 옮겼지만,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당인 응도당은 너무 커서 옮기지 못했다. 1970년대 경운기를 이용해 옮겼는데, 서원 내 왼편에 있다. 응도당은 다른 서원에서 보기 힘든 눈썹처마로 유명하다. 건물 양편 처마 아래로 또 처마가 있는데 이를 눈썹처마라고 한다.
돈암서원 응도당은 다른 서원에서 보기 힘든 눈썹처마로 유명하다. 건물 양편 처마 아래로 또 처마가 있는데 이를 눈썹처마라고 한다.

김장생을 기리는 이 서원엔 아들인 김집과 제자 송시열, 송준길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 후 노론을 대표하는 인물이 송시열과 송준길이다. 서인 김장생을 위해 지어진 돈암서원이지만, 송시열 이후 노론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자리매김했다.

김장생의 제자 중에는 윤선거도 있었다. 김장생 문하에서 송시열과 동문수학한 사이지만 송시열과 의견 차이로 대립했다. 특히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 때 송시열과의 대립이 극에 달해 서인은 노론과 윤증의 소론으로 분열된다.

소론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명재고택과 노강서원이다. 명재고택은 윤증의 호를 딴 한옥이다. 윤증이 팔순을 맞은 1709년쯤 세워졌다. 그가 고택에서 살았던 적은 없다. 윤증의 제자들이 갹출해 건립했지만, 윤증은 근처 초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 윤증은 임금이 18번이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했을 만큼 성품이 대쪽 같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는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가 오히려 화가 닥칠 것을 우려했던 점도 있을 듯싶다.
명재고택 사랑채.
명재고택에는 으리으리한 문도, 경계를 나누는 담도 없다. 바깥주인이 기거하는 사랑채는 풍류를 즐기기 좋도록 개방적으로 지어졌다. 길에서 연못과 항아리들이 줄지어 있는 마당을 지나면 사랑채다. 사랑채 왼편으로 문이 나있는데 이쪽이 안채로 들어가는 입구다. 다른 한옥과는 차별된 구조다.
고택 바로 뒤에는 야트막한 노성산이 버티고 있어 겨울의 삭풍이 직접 들이치지 않는다. 고택의 지붕도 눈여겨봐야 한다. 명재고택의 건물들은 지붕의 높이가 조금씩 다른데, 지붕의 선을 연결하면 노성산 산봉우리와 같은 기울기를 그리고 있어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확인하려면 고택 건너편 둔덕에서 관조해야 한다. 사랑채 동쪽에 놓인 항아리 수백 개가 고택과 어우러져 색다른 풍광을 자아낸다.
논산 노강서원은 윤증과 윤증의 조부, 부친 등의 위패를 모신 소론의 중심 서원으로 강당 등 건물들이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명재고택에서 차로 20여분쯤 떨어진 곳에 노강서원이 있다. 윤증과 윤증의 조부, 부친 등의 위패를 모신 소론의 중심 서원으로 숙종 원년(1675년)에 세워졌다. 노론 측 돈암서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곳으로 강당 등 건물들이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돈암서원보다 규모는 작지만 강당 역시 눈썹처마 등의 특별한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

논산=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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