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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의월요일에읽는시] 장마 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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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2-19 22:18:20 수정 : 2017-04-11 13: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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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넘어온 비가

산 넘어 간다

비단옷으로 와서

무명옷으로 간다.



들 건너온 비가

들 건너 간다

하품으로 와서

진저리로 간다.

물 두드리며 온 비가

물결 밟아 간다

뛰어온 비가

배를 깔고 간다.



아주아주 오랜만에 국밥집에 마주 앉은

가난한 연인의 뚝배기가 식듯이 젖은 비, 젖은 비를 맞잡고 간다.


시에서 자기표절이 심한 사례를 들어보라 한다면 동일 형태·동일 발상의 시가 시집 전체를 누비고 있거나, 아니면 몇 권의 시집까지 계속 이어지는 경우를 대표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게다. 소위 국화빵 시집(판으로 찍어내듯 형태반복을 계속하는 시집). 그런데 웃기는 건 그런 시를 쓴 자신도 이게 자기표절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시인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그걸 개성이라고 거들어주는 평자(評者)와 함께 상까지 주어 격려하는 잡지사도 있다. 시의 자기검열과 혁신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했거나 안일한 창작 태도에 기댄 결과일 것이다.

김영남 시인
이 문제에 관한 한 필자가 읽어본 현직 시인의 시집 중 장석남 시인의 시집이 가장 모범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의 시집은 시집마다 변별력이 있다. 한 권의 시집 내에서도 시마다 다양한 감각과 창의적 발상이 결합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의 결과인, 1급 시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인용시는 그의 일곱 번째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에 실려 있다. 장마가 끝나갈 무렵, 비가 그쳐가는 들녘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비 그치는 모습이 ‘무명옷으로’ 가고, ‘진저리로’ 가고, ‘배를 깔고’ 가고 있어 시인은 그에 ‘젖은 비를 맞잡고 간다’ 고 표현한다. 눈 오는 모습을 보며 미당이 ‘괜찮다’ 한 표현과 비교하면 어떤가.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훨씬 더 현장감이 있고 모던하지 않은가.

김영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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