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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봄바람, 갈등 녹이는 ‘어머니의 입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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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2-25 10:14:18 수정 : 2017-02-25 10: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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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의 문자로 보는 세상] (45) 바람의 노래
‘사람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얀 비둘기는 얼마나 넓은 바다를 날아야 모래 위에서 쉴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이 오가야 그것이 영원히 금지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답은 불어오는 바람에 있네.’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의 첫 구절이다. 우리는 그를 단순한 가수로 생각했는데,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에 알고 보니 ‘노래하는 작가(Sing a song writer)’였다. 대한민국은 얼마나 많은 집회가 더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민주국가가 될 수 있을까. 한반도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더 보내야 남북통일이 가능할까. 얼마나 많은 설전이 오가야 막말이 그칠 수 있을까.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답은 불어오는 바람에 있네.


겨울 동안 온라인으로 접속(接續) 생활만 해 오다가, 우수 철을 맞아 오프라인으로 접촉(接觸) 생활을 하기 위해 친구 네 명과 함께 아침 일찍 남행길에 나섰다. 산이 산재해 있는 걸 보니 대한민국은 산의 나라임이 틀림없다. 응달의 잔설을 보면 산의 북쪽은 아직 겨울이지만, 양달의 햇살 속에 냉이를 보면 산의 남쪽은 이미 봄이다. 인간과는 자연적 접촉을 하고, 자연과는 인간적 접촉을 하리라는 생각에 젖는 순간 어느덧 차는 덕유산과 지리산 자락을 지나고 있었다.

누가 덕유산, 지리산이라 이름 지었을까. 말 없는 산을 두고 ‘덕이 넉넉하다’ 하여 덕유산(德裕山)이라 부르고, ‘어리석은 사람도 이곳에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이름 붙인 사람은 자연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살다 간 우리 선조가 분명하다. 덕유산은 향적봉(香積峰)을 이고 구천동(九千洞)을 안고, 지리산은 천왕봉(天王峰)을 이고 청학동(靑鶴洞)을 안고 있다. 어머니를 닮은 산이다. 그곳에 부는 바람은 어머니의 입김이다. 

산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을만을 안고 있는 게 아니다. 죽은 이의 무덤도 묵묵히 품고 있다. 산자락 양지바른 곳에는 무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눈에 잘 뜨이는 건 나무가 없기 때문이다. 무덤을 ‘뫼’라고도 하는데, 이는 ‘무덤 묘(墓)’와 발음상 동원어로 보인다. 산의 옛말도 ‘뫼’라 하는데, 이는 ‘모이’의 준말이다. 무덤을 가리켜 우리만이 ‘산소(山所)’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이 많은 우리 환경으로 볼 때 ‘산(山)에 있는 묘소(墓所)’의 준말로 보인다. 신비하게도 차가 달리면 산도 달리고, 차가 멈추면 산도 쉰다. 이따금 지나가던 구름이 이웃 산의 소식을 전해줄 때면 산은 구름을 반가이 맞이하며 한껏 포즈를 취한다. 산은 다만 평지보다 땅이 높이 솟아있을 뿐인데 해마다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점점 작아지고 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산이 자라는 것은 산 자체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산에 붙어살고 있는 나무가 자라고 있기 때문일 거다.

나무가 없는 늙은 산의 머리를 보면 왠지 머리숱이 없는 나를 빼곡히 닮아 있어, 친형처럼 정감이 간다. 오랜 세월 비바람이 조각해 낸 산꼭대기 바위들이 저토록 원만하고 아름다운데, 한 세상 풍상을 겪은 내 대머리도 봐줄 만하지 않을까. ‘빛나리 샌님’이 되느냐, ‘빈 나리 샌님’이 되느냐는 머릿속에 이상과 꿈의 유무에 달려 있다.

미국 태생의 유대교 랍비이자 맥아더 장군이 가장 좋아했던 시인인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은 그의 ‘청춘(Youth)’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청춘이란 일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을 뜻한다. 나이를 먹는다고 우리가 늙어가는 것이 아니다. 꿈을 잃어버렸을 때 늙어가는 것이다.’ 

울만은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란 파도(the waves of optimism)’를 탈 수 있는 한 팔십일지라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라 했다. 당시의 팔십은 지금으로 치면 백 세라 해야 할 것이다. 꿈은 아름답다. 그러므로 꿈은 시들지 않고 영원히 피어나는 기쁨의 꽃이다. 이윽고 산과 바다, 역사와 예술의 도시 통영에 도착했다. 통영(統營)은 통제영(統制營)의 준말로 조선 선조 때 설치했던 군영 명칭에서 비롯했다. 통영에서는 바다가 들이 되고 섬이 산이 된다. 통영의 바깥 바다는 파도 소리가 넘쳐도 안 바다는 거울처럼 고요하다. 망일봉 봉우리에 오르니 이순신 장군의 목소리가 바람 속에 들려온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학익진(鶴翼陣) 전법으로 일본 수군을 견내량해협으로 유인하여 궤멸시킨 한산대첩, 통영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이순신공원을 만들고 임전훈(臨戰訓)을 내리는 장군의 모습을 동상으로 세웠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살기를 각오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지금 장군이 살아계신다면 우리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주실까. 통영은 예술의 도시이기도 하다.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시인을 비롯하여 ‘토지’의 저자 박경리,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등의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통영은 현대 한국 예술의 르네상스를 맞이한 곳으로 예술의 수도라 이를 만하다. 청마문학관을 찾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깃발’ ‘바위’ ‘춘신’ ‘행복’ 등의 시로 잘 알려진 대시인 청마 유치환과 규수시인 이영도 사이의 전설 같은 사랑을 생각하며, 20년 동안 5000여 통 사랑의 편지를 부치던 우체국을 찾았더니, 지금도 우체통은 그 자리에서 얼굴을 더욱 붉히며 사랑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경리 기념관을 지나 묘소 참배를 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는 비문 내용에서, 만년에 치료를 거부하고 아픔마저 안고 간 깨달은 자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이 인간의 근원이라면 생명의 하나인 인간도 자연입니다. 그러니 자연과 인간이 합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고 섭리입니다. 이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어요.’ 자연과 생명의 존엄을 밝힌 말씀이다.

‘천형(天刑)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사마천을 롤 모델로 하여 생의 아픔을 극복한 선생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산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육지인 통영으로 옮겨오면서 지어진 세병관(洗兵館). 산비탈의 삶을 아름다운 전망과 그림으로 승화시킨 동피랑마을과 역사의 혼과 환경을 조화시킨 서피랑마을을 거치고는 미륵산 정상에 올라야 한다. 그곳에서 한려해상국립공원을 조망하면 누구나 금세 섬이 된다. 그리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보라.

‘부는 바람일랑 쐬고, 지는 동백꽃은 내버려 둬. 너를 자연에 맡기면 세상이 즐겁단다~.’

권상호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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