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한양서 ‘김생원 댁’ 찾기… 주소체계 혼돈에 못 전한 편지 가득

입력 : 2017-02-25 11:00:00 수정 : 2017-02-25 10:16:35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한국사의 안뜰] <34>주소체계의 변화와 우편제도의 도입 도로명주소가 시행된 지도 여러 해가 지났지만, 기대만큼 더 편리해졌다는 느낌은 없다. 이제는 편지를 주고받을 일도 많지 않고, 내비게이션이 생기면서 상호나 전화번호만 있어도 길을 찾을 수 있다. 스마트 기기에 의존하게 되면서,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주소나 전화번호를 외는 능력은 현저히 감퇴했다. 도로명주소는 길 이름과 건물의 배치 순서를 조합해서 만들지만, 예전의 지번주소는 소유권과 용도에 따라 구분된 ‘필지’라는 토지 단위에 번호를 매긴 것이다. 도로명주소를 쓴다고 해서 지번주소가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은 지적도에는 여전히 각 필지가 몇 번지로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로명이든 지번이든 주소체계라는 것은 일정하게 구획된 땅이나 건물마다 이름을 붙이는 제도다. 그러나 지번주소는 그보다 훨씬 보편적인, 이론상 전국의 모든 땅을 필지로 구분해 일일이 매긴 이름이다. 그것은 식민지 시기인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지적도가 처음 만들어질 때 함께 생겨났다.

1932년 경상도 단성현 호적대장의 법물야면 가술촌 부분. 5가(호)씩 1통 단위로 기재되고 각통 1호(통수)마다 난외 상단에 ‘통(統)’이라는 붉은 도장으로 표시를 했다.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제공
소출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었던 논밭은 조선시대에 ‘양전’(量田)이라는 토지조사의 대상이었고, 지금처럼 모양과 면적이 정확하게 측량되지는 못했다. 또 사람이 사는 집은 당시의 토지조사 대상이 아니었다. 그나마 1675년(숙종)부터 ‘오가작통’(五家作統) 제도가 시행되면서 집집마다 몇 통 몇 호라는 번호가 매겨지게 되지만, 그것이 가옥이나 대지(家座)를 가리키는지 그곳에 사는 한집 식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호적대장은 3년마다 새로 편성을 했는데, 남아 있는 호적대장을 보면 통·호는 비교적 잘 표시가 되었지만, 같은 동네(里) 안에서도 대다수 집들이 3년마다 다른 통호번호로 기재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3년에 한 번 이상, 그것도 같은 마을 안에서 그토록 자주 이사를 다녔을 리는 만무하니, 이것은 3년에 한 번 호적대장을 새로 만들 때마다 통과 호를 새로 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오가작통제의 규정 자체는 무척 엄격해서, 통마다 통수(統首)가 각 호 호구를 적은 ‘통패’(統牌)를 만들어 출생, 사망의 유무를 조사해서 분기마다 보고했고, 이사를 할 때에는 이유와 이사 갈 곳을 미리 신고해서 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게다가 경찰력이 없는 시골에서 이웃끼리 서로 돕고 감시하면서, 도둑도 잡고, 불이 나면 불도 끄는 인보(隣保) 조직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호적상의 통·호가 그때마다 바뀌는 상황에서 이런 규정이 제대로 지켜졌을지 의문이다. 물론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천주교와 동학이 확산하고 여러 차례의 민란으로 나라 안이 어수선해지자, 중앙정부와 지방 수령들은 5가나 10가로 작통하고 향약도 활용해서 지방을 적극 통제하려 한 일도 있기는 했다.

1896년 9월부터 종전과 달리 미리 인쇄된 호적표 양식에 정해진 규정대로 해당사항을 기재하게 한 새로운 호적제도가 시행되었다. 매년 호적을 갱신하고 통·호 번호를 고정시켜 바꾸지 못하게 하면서, 집집마다 통·호와 호주의 직업, 성명을 쓴 나무 문패도 만들어 걸게 했다. 그러나 이때의 규정 역시 잘 지켜지지 않았다. 신식 호적제도의 호구 파악률은 오히려 더 떨어졌고, 호적표에 자기 집이 몇 통, 몇 호로 기재되었든 사람들은 자기 집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1884년 우정국 개국축하연이 갑신정변으로 비화되면서 선을 보이자마자 좌절되었던 우편제도는 신식호적제도가 시행된 이듬해 다시 도입되었다. 이전까지는 집안의 노비 등을 활용해서 편지와 물건을 전하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적 통신망밖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편망은 국가가 전국에 걸친 간선, 지선을 그물망처럼 운영하는 것이다. 전자가 ‘P2P’ 방식이라면 후자는 ‘월드 와이드 웹’ 정도가 된다.

국가가 운영하는 우편, 전신제도의 도입으로 개인들은 훨씬 저렴하게 또 빠르게 우편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우편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전국적 통신, 교통망은 물론 주소체계가 완비되어 있어야 했다. 1896년, 신식 호적제도로 모든 집들에 고정된 통·호 번호가 매겨지게 되고 문패까지 부착되었을 테니 아무 문제가 없지 않았을까 싶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편지봉투. 대부분 지역과 받는 사람의 이름만 적혀 있다.
장서각 제공
독립신문을 통해 이 시기의 실상을 엿보면, 대개 편지 겉봉 주소는 ‘건춘문 건너 임봉운의 집 최주사’(1897년)라든가 ‘진골 쫄쫄우물로 들창 난 집 사는 누구’(1897년)라고 썼던 모양이다. 서서(西署) 반송방(盤松坊) 몇 통 몇 호라든가 하는 호적상의 주소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정이 그러니,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주소와 이름이 불분명해서 우체사에서 대강 짐작해서 배달을 하지만, ‘허다한 박주사 댁과 김생원 댁’을 찾을 수 없어 체전부가 종일을 헛걸음을 하고(1897년), 결국 배달도 반송도 못한 편지가 우체사에 적성권축(積成卷軸)하였다고 한다(1899년).

사실 겉봉에 이름을 제대로 쓰지 않는 것은 단순한 실수나 무지는 아니었다. 독립신문에서도 편지를 부치는 사람이 ‘봉투에 자기의 성명 쓰는 것을 대단히 수치로 알고 아니 쓰는지’(1897년) 하고 비판을 했지만, 이것은 특히 웃어른의 이름에 대한 유교적 관습과 관련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전통적으로 왕이나 조상의 이름 글자를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았고, 심지어 양반들은 관문서에 제 이름 올리기를 꺼려 자기의 소유권을 증명해야 할 문서에도 토지를 노비 이름으로 기재하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는 웃어른의 이름을 말할 때는 무슨 자, 무슨 자라고 끊어서 말하는 것을 예절이라고 배우고, 친구 사이에도 나이가 좀 들면 이름 대신 직책 등을 부른다. 

서호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그렇게 사람들과 서먹했던 주소체계는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정착되어갔다.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면서 통·호로 된 주소가 지적도상의 지번주소로 바뀌었다. 다만 초등교육도 못 받은 이가 많았던 당시로서는 그런 정도의 지번 주소를 익히고 외는 것도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다. 1941년에 발표된 박태원의 단편소설 ‘채가’에서는 딸 설영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유치원 입시경쟁이 2대 1에 달해 간단한 면접으로 아동을 선발하는 상황이라, 집에서 면접 예행연습을 하는 장면이다. “너희 집이 어디지?” 하는 선생님 역할의 엄마 물음에 설영이는 “돈암정, 사백팔십칠번지의 이십이호예요”라고 대답하고, 그 모습이 대견한 화자는 설명을 덧붙인다. 번지가 간단이나 하면 모르겠지만 ‘487번지’만 해도 이미 엄청난 숫자인데 거기에 다시 ‘22호’다, 집의 행랑어멈은 들어온 지 8개월이 넘지만 이 번지를 왼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식민지기의 ‘정’(町)은 해방 이후 ‘동’(洞)으로 바뀌지만, 주소는 그대로 이어졌다. 그냥 487번지가 아니라 ‘487번지의 22’인 것은, 애초 그 일대가 하나의 큰 필지였던 것이 나중에 여러 개의, 적어도 22개 이상의 작은 필지로 분할되었다는 뜻이다. 도시 주변의 새로 개발되는 녹지가 대개 그런 경우다.

이제 우리는 전통시대처럼 몇 대를 한 마을에서 사는 대신 자주 이사를 다니고 또 때로는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져 살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소는 이름과 함께 나를 민법상의 사람(자연인)으로 표시하는 기호이자 남들에게 내 존재와 정체성을 입증하는 수단이다. 신문 사회면에서 ‘성명 미상’이거나 ‘무직’에 ‘주거부정’이라는 말과 마주쳤을 때 느껴지는 불안과 공포를 생각해보라. 주소 한 줄에도 이토록 켜켜이 사회적 의미와 역사의 먼지가 쌓여 있는 것이다.

서호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