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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 "007도 실패"…서방 정보기관도 실패하는 대북 첩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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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2-26 08:00:00 수정 : 2017-02-25 11: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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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비하한다는 논란을 겪었던 007 시리즈 20번째 영화인 ‘어나더 데이’(2002년)를 봤던 사람들은 영화 초반 주인공 제임스 본드(피어스 브로스넌 분)가 겪었던 위기를 기억할 것이다. 

전통적 이미지로는 마지막 제임스 본드였던 피어스 브로스넌. 영화 어나더 데이에서 북한군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북한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하던 제임스 본드는 베일에 싸인 배신자로 인해 위기에 직면한다. 동료 요원들이 희생된 상황에서 북한군에 포로로 잡힌 제임스 본드는 수개월 동안 구금되어 혹독한 포로생활을 한다. 협상을 통해 석방됐지만 영국 정보국 MI6는 정보누설 혐의로 제임스 본드의 더블00요원 지위(살인면허)를 박탈한다. 그가 명예를 회복하고 임무를 완수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비록 영화지만 어나더 데이에서 제임스 본드가 겪은 위기는 북한에서 첩보원이 수행하는 인간정보(휴민트, HUMINT)를 통한 공작활동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간접적이나마 알 수 있게 해준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러시아, 중국, 이란 등도 인간정보에 의한 정보수집과 공작이 쉽지 않은 나라지만 북한은 아예 불가능에 가깝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수집능력을 갖고 있다는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북한에서의 인적 정보라인 구축을 시도하지 못했다. 감청이나 위성 사진만으로는 파악하지 못하는 사안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인간정보의 도움이 필수적이지만 북한에서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 배신과 불신이 난무하는 인간정보의 세계

인간정보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은 바로 냉전 시기다. 미국과 구소련은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외교관이나 상사원 등으로 위장해 전 세계에 파견하는 한편 신분을 감춘 채 잠입하는 ‘블랙’ 요원을 투입해 협조자를 확보하는 등 인간정보 수집에 혈안이 됐다. 미국의 경우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를 저지른 ‘검은 9월단’ 작전국장이었던 알리 하산 살라메를 정보원으로 삼아 하와이 휴가비 등을 부담하는 대가로 정보를 제공받았을 정도였다. 

아프간에서 미 육군 장병들이 아프간 정부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훈련병들을 정렬시키고 있다.
서방 정보기관들의 인적정보 라인 구축 경쟁은 2001년 테러와의 전쟁을 기점으로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기존에는 국가를 상대로 공작을 했지만 이제는 알카에다와 탈레반 등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테러 조직에 요원을 잠입시키거나 수뇌부의 일원을 포섭하는 활동, 이중 스파이 등 인간정보 분야에서의 전통적 요소들이 다시 부각됐다. 이에 따라 CIA와 MI6 등 정보기관은 물론 아프간 이라크 주둔군도 정보장교들을 동원해 인간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오늘은 웃는 얼굴로 헤어졌지만 다음날에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할 위험이 있을 정도로 믿을 수 있는 정보원이 거의 없었다. 정보 제공의 대가로 돈을 지불했지만 ‘먹튀’를 하거나 거짓 정보를 주기 일쑤였다. 정보요원이 직접 나섰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미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보장교들은 언론에 “일반인부터 아프간 정부 고위직까지 탈레반이 손을 뻗지 않은 사람이 없다. 누굴 믿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게 일상이었다.

미 공군 E-3 조기경보통제기가 공중급유를 받고 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서방측의 다급한 심정을 역이용했다. 2008년 6월17일 아프간 남부 헬만드주와 칸다하르주 접경지역에서 사망한 영국군 정보부대 소속 사라 브라이언트 병장은 특수부대인 SAS 대원 4명과 함께 정보수집을 위해 아프간인 정보원을 만나러 갔다. 첫 만남에서부터 좋은 정보를 제공했던 정보원은 갑자기 영국군 기지 인근으로 오기를 꺼려했고, 브라이언트 병장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사는 마을로 가야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설 때 폭탄이 터지면서 브라이언트 병장과 SAS 대원들 모두 숨졌다. 브라이언트 병장이 믿었던 정보원은 탈레반이 그를 유인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사건 직후 탈레반 대변인 자비훌라 무자헤드는 “관측원이 기다리다 목표를 확인하고 원격으로 폭탄을 기폭시켰다”며 자신들이 사전에 기획했다고 밝혔다.

이라크에서 반군이 설치한 급조폭발물이 폭발하는 모습.
2009년 12월30일 아프간 동부 코스트주 채프먼 전초기지(FOB)에서 발생한 자살폭탄테러로 CIA 요원 7명을 포함한 14명이 사망한 사건은 CIA를 비롯한 서방 정보기관과 군 당국에 큰 충격을 줬다. 채프먼 기지는 CIA가 현지 정보 수집을 위해 운용하던 비밀기지로 아프간에서 활동하던 정보요원 중 가장 노련한 팀이 머물고 있었다. 사건의 범인인 후맘 칼릴 모하메드라는 요르단 의사는 요르단 정보당국이 포섭해 해외 지하드 조직원으로 속여 알카에다 조직에 침투시킨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정체는 알카에다가 미군 기지 테러를 위해 보낸 이중간첩이었다. 사건 당일 범인은 알카에다로부터 받은 폭발물을 가지고 CIA 기지에 진입했지만 그의 상사였던 요르단 정보당국자 샤리프 알리 빈 자이드 대위가 그를 통과시켜 보안검색을 받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CIA 최고의 아프간 지역 인적정보팀이 통째로 사라졌다. 자이드 대위도 현장에서 즉사했다. 아프간 첩보전에서 CIA가 탈레반에 참패한 것이다.

◆ 아프간보다 북한이 정보공작 펼치기 힘들다

서방 정보기관의 인간정보 공작이 가장 취약한 곳은 북한이다. 러시아, 이란 등 반미 성향 국가들도 경제 활동 등을 이유로 외국인들이 운신할 공간이 생긴다. 상사 주재원이나 특파원들은 제한된 수준이나마 활동을 할 수 있어서 인적정보 라인을 구축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판문점에서 경계중인 우리측 헌병 뒤로 북한군이 카메라를 든 채 동향을 감시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철저히 폐쇄적인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외국인이 북한을 방문하면 곧바로 삼엄한 경계를 받으며 모든 행동이 감시의 대상이 된다. 미 국무부의 북한 여행경보에 따르면 북한 내부에서 개인의 사적인 영역은 지켜지지 않는다. USB, CD-ROM, DVD, 휴대전화, 태블릿 노트북 컴퓨터, 인터넷 검색 기록 등은 모두 검열될 수 있다. 북한 당국이 여행자들의 휴대전화 반입을 허용한다 해도 북한 통신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으면 작동되지 않고, 통화 기록도 북한 당국에 노출된다. 북한 체제나 지도자를 비판하는 내용의 출판물 등을 소유하면 범죄 행위로 간주돼 노동수용소에서 장기간 구금되고 벌금을 물어야 한다. 실제로 미국인 대학생 오토 프레드릭 웜비어(22)는 지난해 1월 관광 목적으로 북한에 들어가 숙소인 평양 양각도 호텔의 제한구역에서 정치 선전물을 떼어내려다 국가전복음모 혐의로 기소돼 노동교화형 15년형을 선고받았다. 허가 받지 않은 국내 여행, 현지 주민들과의 접촉, 환전, 사진 촬영, 음란물 반입, 외국인 전용 외의 상점에서 물건 구입, 정치구호물이나 지도자 사진 훼손 등은 모두 범법 행위로 간주된다.

외국인들을 해로운 바이러스 대하듯 경계하는 북한에서 인간정보를 통한 공작이나 정보 수집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내부 정보망이 없다보니 첩보를 정확히 확인하지 못한 채 행동하다 ‘뒤통수’를 맞는 일도 발생한다.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 한미 정보기관들은 북한이 공식 발표하기 전까지 이를 사전에 감지하지 못했다. 2015년 4월29일 국가정보원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할 것이라고 국회에 보고했으나 하루 뒤 러시아에서 공식 부인했다. 지난해 2월에는 리영길 당시 북한군 총참모장이 숙청됐다고 했으나 3개월 후 열린 노동당 7차 대회에서 리영길은 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돼 건재를 과시해 내외신의 질타를 받았다. 첩보를 최종 확인해줄 수 있는 인간정보가 제 역할을 했으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일이다. 

이병호 국정원장이 15일 국회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 피살 사건과 관련해 열린 긴급 정보위원회의에 출석해 회의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남정탁 기자
한미 정보당국의 대북 정보수집은 정찰기와 신호정보 수집기, 인공위성, 지상 감청시설 등을 통해 북한의 유무선 교신을 엿듣는 SI(Special Intelligence) 첩보에 크게 의존한다. 하지만 SI 첩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북한에서는 휴대전화 사용이 제한되어 있고 인터넷 역시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 전화선은 지하에 매설되어 있어 감청 장비들은 무용지물이다. 험준한 산악지형과 북한의 위장술 등으로 인공위성을 통한 영상정보 수집도 쉽지 않다. 북한이 한미 정보당국의 신호정보 수집을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역정보를 흘리거나 주파수, 암호체계를 변경하는 등 기만책을 사용하는 것도 대북 정보공백을 키운다. 상대의 내밀한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내부 정보원으로 이를 보강해야하지만 북한은 서방 정보기관들이 정보원을 확보할 틈조차 내주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북한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인간정보 분야를 육성하면 서방 정보기관들이 갖지 못한 첩보망을 확보할 수 있다. 첨단 장비들이 전장을 누비는 시대에서도 인간이 무기인 인간정보 분야는 여전히 첩보전의 핵심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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