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과 다시 손을 뜨겁게 잡을 수 있을까.
1965년 수교 이후 최악으로 평가되던 한·일 관계가 크리스마스 이브인 지난달 24일 양국 정상의 만남을 계기로 일단은 봉합된 모양새다. 켜켜이 쌓인 과거사 갈등 문제로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양국 감정은 다시 과거사 문제를 발단으로 지난해 수출규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연장 보류 등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다시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지만 과거사 문제의 근본 해결 방안이 요원해 양국 관계는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최악의 2019년 한·일 관계… 막판 극적 반등
과거사 문제 등으로 갈등이 없었던 적을 꼽을 수 없는 한·일 관계이지만 문재인정부 들어 갈등은 더 깊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첫 통화에서 박근혜정부 때 맺어진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대해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을 밝혔다. 박근혜정부는 2015년 12월28일 일본 측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으로 종결할 것을 약속했지만, 이 합의가 피해자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데다 일본의 법적 책임도 불분명해 논란이 컸다. 문 대통령은 위안부 합의 재협상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양국의 공식 합의였던 점 등을 고려해 정부 출범 이후에도 재협상을 요구하진 않았다. 대신 합의 이후 위안부 피해자 지원 등을 목적으로 일본 측이 10억엔을 출연해 만들어진 ‘화해·치유재단’을 해산 조치하며 사실상 합의를 파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가해 일본 기업들이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우리 정부는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며 말을 아꼈지만,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위배된다며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일본은 이후 한국을 ‘안보상 신뢰할 수 없는 국가’라며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수출규제로 보복에 들어갔다. 우리 정부 역시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배제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 이를 제소했다. 또한 북한에 대한 핵·미사일 정보 등을 공유하는 지소미아의 연장을 중단하기로 결정하며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한국 내에선 반일 감정이 불붙으며 일본 제품 구매와 일본 여행을 자제하자는 ‘노 재팬(No Japan·일본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일본 내에서도 서점에 혐한 코너가 생기는 등 어느 때보다 반한 감정이 커졌다.
최악의 상황에서 새해를 맞을 것 같았던 한·일 관계는 미국의 ‘지소미아 유지’ 압박이 양국에 가해진 것과 동시에 파국을 막아야 한다는 양국의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지난 연말 극적으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지난달 24일 중국 청두에서 15개월 만에 양국 정상회담을 가졌다. 양 정상은 수출규제와 관련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과 함께 양국이 서로에게 중요한 이웃이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
◆올해도 과거사 문제로 갈등 이을 듯
한국 측의 ‘지소미아 종료 및 WTO 제소의 조건부 유보’와 일본 측의 ‘수출통제 관련 양자 간 협의 채널 재가동’을 맞교환하는 형태로 양측이 한발씩 물러났지만 올해에도 양국 갈등이 불거질 요소들이 상존한다.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는 최근 내놓은 ‘2020년 국제정세 전망’에서 “해방 이후 한·일 신관계 성립의 근간이 됐던 1965년 체제의 내재적 모순, 전후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역사인식 부재 등으로 인해 과거사 문제는 올해도 다양한 형태로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연구소는 “단기적으로는 2020년 봄에 이뤄질 대법원 판결에 따른 일본 기업 압류자산의 현금화 조치를 계기로 크게 요동칠 것”으로 예상했다. 현금화 조치가 집행된다면 일본은 한국산 수출품에 대한 보복관세와 일본 제품의 공급 정지, 비자 발급 제한 등으로 보복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오는 4월 예정된 제21대 총선도 갈등이 불거질 수 있는 요소 중 하나로 꼽힌다. 연구소는 “국내 정치 일정과 맞물려 한·일 양국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 독도 등 과거사 문제와 결부된 공격적 민족주의가 크게 고조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서는 7월24일부터 열리는 일본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아베 정권이 숙원 사업인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전환하면서 한국 등 주변국과의 갈등을 빚을 우려도 제기된다. 아베 총리는 지난 1일 신년사에서도 헌법 개정을 거론하며 의지를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국내 차원의 정리와 합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한·일 관계 흐름은 바뀌었지만 내용 자체는 변한 게 없기 때문에 올해도 ‘전쟁 전 평화’와 같은 분위기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며 “일본 기업 자산 현금화 조치 등 과거사 문제가 국내에서 먼저 정리되지 않는다면 일본이 먼저 우리에게 전향적인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재신 국립외교원 일본연구센터 고문은 “문재인정부가 강조하는 ‘투트랙 어프로치’(과거사와 외교 분리 접근) 기조는 이론적으로는 맞지만 현실적으로는 상황에 맞지 않는 일”이라며 “결국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과거사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 변화할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없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고문은 “일본에 불법 식민지 지배의 법적 책임을 묻되 배상 책임을 떼어내는 식의 접근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피해자는 물론 일반 국민들과도 이와 관련한 소통을 늘리는 등의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정우·홍주형 기자 woo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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