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의 장례를 '서울특별시장(葬)'(서울시가 구성한 장례위원회가 주관하는 장례) 형식으로 치르는 것을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11일 40만을 돌파했다. 청원 시작 이틀 만에 40만명 넘게 참여한 것이다. 박 시장의 지지자를 비롯해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들은 고인이 시민운동과 서울시장으로 일생을 헌신한 노고에 마땅히 예우하고 의혹만으로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고 반발하고 있지만, 청원 동의는 빠르게 늘고 있다.
청원인은 “박 시장의 사망으로 그의 비서 성추행 의혹은 수사 없이 종결됐지만, 과연 전례 없는 서울특별시장으로 치를 만큼 떳떳한 죽음이냐”고 묻는다. 경찰에 정식으로 고소장을 접수하고 피해를 주장한 당사자가 존재하며, 2차 피해마저 우려되는 상황에서 치러지는 화려한 5일장이 과연 정당하냐는 것이다.
앞서 여비서 성폭행 혐의로 실형을 받고 수감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모친상 상가에도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의 조화와 조문 행렬이 이어져 논란이 일었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여성의 가사노동 문제 등을 다룬 여성주의 고전)을 추천도서로 내밀었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던 박원순 서울시장. 유력한 대권 주자이자, 여성 인권 문제에 앞장섰던 두 정치인을 둘러싼 논란은 공교롭게도 여러모로 닮아 있다.
◆죽음으로도 덮을 수 없는 것…고소인에 ‘2차 가해’ 삼가야
지난 10일 박 시장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 전직 서울시청 직원 A씨의 성추행 의혹 고소는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전망이다. 피해자는 수년간 피해를 입고 어렵게 용기를 냈으나 사건은 수사되지도 못한 채 종료된 것이다.
A씨는 진실을 밝힐 기회를 박탈당했을뿐 아니라 박 시장의 죽음에 책임이라도 있는 양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부 네티즌들이 고소인의 신상을 터는데 혈안이 돼 있고, 이미 관련 없는 사람의 사진이 나도는 등 2차 피해가 현실화하고 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박 시장 성추행 의혹 고소인에 대해 명예를 훼손하고 위해를 고지하는 등 2차 가해 행위에 대해 내사에 들어갔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 요청 시 다양한 방편으로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신변 보호 조취를 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 시장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물결이 뜨거워질수록 힘들게 용기 낸 피해자가 더이상 공포와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법적으로는 사건이 종결되었더라도 직장 내 성폭력이므로 해당 기관인 서울시청이 책임지고 피해자를 보호하고 구제하라”는 요구와 함께 ‘#박원순_시장을_고발한_피해자와_연대합니다’ 해시태그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박 시장 지지자 등은 성추행 의혹은 의혹일 뿐인데 고인을 욕되게 하느냐며 펄쩍 뛴다. 그렇다고 억울하니 진실을 밝혀보자는 목소리는 없다.
박 시장의 죽음으로 관련 의혹을 유야무야 하거나 섣불리 면죄부 주지 않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자살로 공소권을 상실시킴으로써 성범죄의 심각성이 죽음에 가려지고, 가해자 단죄에도 힘이 빠지는 흐름은 낯설지 않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거나 스스로 망가뜨린 앞날을 안쓰러워하기보다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 방지와 그의 일상 회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다는 의미의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라는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교묘하게 본질을 가리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 관련 뉴스 댓글을 보면 ‘미투가 사람 죽였다’, ‘미투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미투로 인격 살인을 당했다’ 등의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피해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도구로서 미투를 언급하는 분위기는 지양해야 한다. 미투 고발은 어디까지나 피해자가 하는 것이다. 가해자가 ‘미투 당했다’고 도리어 피해를 입은듯 암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당했다면 성범죄 혐의로 고소를 당했을 뿐이다.
◆‘여성 인권’ 높이겠다던 그들의 배신…권력형 성폭력의 본질
30년간 시민운동과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알린 박 시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희롱 소송인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을 무료 변론해 5년의 공방 끝에 유죄 판결을 받아낸 인물이다. 직장 내 성희롱에 강력한 경고가 된 상징적인 첫 승소를 이끌었고, ‘페미니스트 정치인’을 자처해 온 그가 다름 아닌 성추행 사건으로 피소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충격이 쉽사리 가시지 않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원순 서울시장에 이르기까지 최근 드러난 굵직한 정치권 미투만 3건에 달한다. 수도와 제2의 도시의 수장이 동시에 미투 폭로로 자리를 비우게 된 나라.
가해자는 한 명이어도 피해자는 대부분 한 명에 그치지 않는다.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기 전 가해자를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폭로의 주요 동기가 됐다. 조직이나 사법 기관에서는 묵살될 것이 뻔해 ‘최후의 수단’으로 언론 폭로를 택하기도 했다.
일부 남성 개인의 일탈로만 치부한다면 앞으로도 달라질 것은 없다. 권력을 가진 남성이 젊은 여성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인식, 자신의 업적과 노고에 대한 보상 또는 위로를 여성에게 얻도록 학습된 문화, 공인으로서의 성 인지 감수성과 개인의 젠더 의식을 일치시키지 않는 괴리감, 약자의 인권을 짓밟는 갑질로서의 성폭력에 대한 이해 부재 등을 기득권 남성성이 자각하고 자정하지 않는 한 문제는 반복될 것이다.
◆부족한 성 인지 감수성은 국가를 위협한다
여전히 성폭력의 본질과 심각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 문화 역시 권력자의 성범죄를 방치하고 키운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이래서 비서를 여자로 뽑으면 안 된다”, “비서가 너무 예뻐도 곤란하다”는 말 등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것, 가해자의 죽음에 침통과 애도를 표하지만 피해자의 안녕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 성범죄로 복역 중인 이에게 거리낌 없이 권력자들의 조문 행렬이 가능한 분위기에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 등은 모두 부족한 젠더 감수성을 드러낸다.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피해자의 말은 손 쉽게 의심하는 구태의연한 인식은 아직도 생명력이 질기다.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운영자에게 징역 1년 6개월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나라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법원은 최근 손정우의 미국 송환마저 막아 논란을 또 한번 자초했다. 미국에 분명히 피해자들이 있었기에 이뤄진 범죄인 인도 청구다. 그 피해자들의 입장을 정말 고려했다면 같은 판단을 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외신과 미 법무부가 일제히 법원의 인도 거부 결정에 경악하고 비판한 이유다.
최근 불거진 안희정 모친상 조문 논란은 이 사회가 보는 권력형 성폭력의 실체가 어떠한지 잘 드러낸다. 성폭력 가해자에게 대통령이 직함을 단 조화를 보낸 것을 시작으로 유력 정치인과 유명인이 줄줄이 문상을 간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에 “범죄자에게 조문도 하지 마라는 것이냐”는 반론이 팽팽히 맞선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위력에 의한 성범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권력형 성범죄를 저지른 이가 ‘살아있는 권력’들과 여전히 친밀하게 스킨십하는 모습은 피해자에게, 그리고 시민들에게 어떤 인상을 줄까. 성범죄 의혹이 제기된 이의 장례식이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러져 유력 정치인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조문하는 모습은 또 어떨까.
그들의 추모가 뜨겁고 화려할 수록 피해자의 존재는 더 작아지고 고통은 커진다. 무엇보다 사법부가 단죄한 이에게 정치적 면죄부가 발급되는 장면으로 읽힐 우려가 있다. 코로나 시국의 조용한 장례 예법을 사양하면서까지 조문 정치를 한 사람들은 이를 보다 신중히 고려했어야 했다.
위력의 존재를 다시 한번 증명한 안희정 전 지사 모친상 풍경에 시민들은 피해자 김지은씨가 쓴 미투 고발 수기 ‘김지은입니다’(봄알람, 2020)를 역주행시켜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것으로 화답했다. 가해자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자정 작용과 개선이 없다면 행동하는 이들은 늘어날 것이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이처럼 무딘 젠더 의식의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사람들을 분노하고 체제를 의심케 하는지 국가적 위기 관점에서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썼다. 더 이상 일부 여성들이 들고 일어나는 감정적 반응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는 일갈이자 사회 발전에 해가 되는 원흉으로서 성범죄를 진지하게 마주하라는 목소리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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