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책에도 외신·현지 반응은 회의적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뒤 첫 기자회견에서 여성의 권리를 존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탈레반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자 아프간 현지에서는 “일단은 다행”이라는 안도의 분위기와 “위장 전술일 것”이라는 회의가 공존하고 있다.
17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이날 탈레반 대변인 자비훌라 무자히드는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무자히드 대변인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매우 활동적일 것”이라며 “이슬람 율법 아래서 여성들은 일하고,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성 인권을 보장하겠다면서도 ‘이슬람 율법 내’라는 단서를 단 셈이다. 동시에 그는 구체적인 복장 규정과 여성의 사회 활동 수준에 관해서는 부연하지 않았다.
탈레반은 유화책의 연장으로 아프간 전역에 사면령도 내렸다. 무자히드 대변인은 “이전 정부와 일했거나 외국 정부에 협력한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을 것”이라며 “부역자들이 사는 곳을 찾아가 왜 부역했는지 묻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 언론이 독립성을 갖고 보도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다만, 국가적인 가치에 반하는 방식으로 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포용적 모습을 보이는 탈레반을 두고 BBC는 아프간 국민과 국제사회의 여론을 다독이기 위해 정교한 홍보 캠페인을 펼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탈레반이 집권할 당시 여성의 사회 활동이 극단적으로 막혔던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붕괴한 아프간 정부의 여성 국회의원 파르자난 코차이는 “탈레반은 여성도 향후 정부에 합류하게 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들이 만드는 정부에 의회라는 게 있긴 하느냐”며 “여성들의 자유가 제일 큰 걱정”이라고 지적했다. 현지의 한 여성은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불신을 보였고, 또 다른 여성 역시 “그들은 우리를 벌주기 위해 꾀어내는 것”이라며 “탈레반 아래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겠다는 탈레반의 말에 안도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BBC는 전했다. 한 여성은 “우리가 일하고, 교육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나에겐 자유라는 정의”라며 “탈레반은 자유의 한계선을 아직 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공부하고, 일할 수만 있다면 히잡을 쓰는 것쯤은 문제 되지 않는다”며 “부르카만 아니라면 이슬람 복장 규정은 받아들인다”고 덧붙였다. 히잡은 머리와 목을 가리는 두건이며, 부르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가리는 가장 보수적인 복장이다.
한편, 이날 탈레반의 실질적 지도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가 10여년 만에 아프간으로 돌아왔다. 외신들은 바라다르의 복귀가 새 통치 체제 발표 임박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현재 탈레반의 최고 지도자는 물라 하이바툴라 아쿤자다이지만, 가장 대중적인 지도자는 바라다르가 꼽힌다. 바라다르는 1994년 탈레반을 창설한 네 명 중 한 명으로 오사바 빈 라덴의 측근이다. 지난해 9월 카타르 도하에서 9·11테러 이후 열린 첫 아프간·탈레반 평화협상에서 탈레반을 대표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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