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FC 한국 팬이라면 2018년 11월 10일의 한 장면을 잊지 못할 테다. 이날 열린 UFC 파이트나이트의 메인이벤트는 UFC 페더급 랭커 ‘코리안좀비’ 정찬성(36·한국)과 야이르 로드리게스(31·멕시코)의 대결이었다. 경기는 박빙이었지만 정찬성의 근소 우세였다. 경기가 끝나기 1초 전까지는.
정찬성과 야이르 로드리게스는 피 튀기는 타격싸움을 선보였다. 5라운드 5분 경기를 끝마치기 10초 전, 로드리게스와 정찬성은 포옹을 하며 서로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그대로 경기가 끝나면 정찬성의 판정승이 확실시되는 상황. 정찬성이 펀치를 내며 로드리게스에게 달려들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각도에서 로드리게스의 팔꿈치 공격이 날아왔다. 정찬성은 그대로 고꾸라져 실신했다. 로드리게스의 5라운드 4분59초 KO승. UFC 역사상 가장 ‘뒤늦게’ 나온 KO승이었다. 이 승리로 로드리게스는 ‘2018년 올해의 KO상’을 탔다.
로드리게스는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핵펀치’로 유명한 제레미 스티븐스(37·미국)를 압도했고, 맥스 할로웨이(32·미국)에게 지긴 했지만 비등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이후 브라이언 오르테가(32·멕시코)를 1라운드 TKO로 꺾었고, 최근엔 조쉬 에멧(38·미국)을 2라운드에 서브미션으로 잡으며 잠정 챔피언에 등극했다.
페더급에서 가장 예측 불가한 사나이. 로드리게스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평가다. “공격이 변칙적이라 까다롭다”는 게 이유다. 로드리게스의 변칙성이 이제 가장 큰 산을 마주한다. 페더급에서 한 번도 진 적 없는 사나이, 페더급의 제왕 알렉산더 볼카노프스키(35·호주)다.
◆“준비됐다…주말에 어떤 뜻인지 보게 될 것”
로드리게스는 오는 9일(한국시간) 라스베이거스 T-모바일 아레나에서 열리는 UFC290에서 페더급 타이틀을 놓고 볼카노프스키와 격돌한다. 볼카노프스키는 현재 페더급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맥스 할로웨이와 정찬성, 브라이언 오르테가 등 최정상급 선수들을 가뿐히 이기며 ‘급이 다른 선수’라는 걸 증명해냈다.
로드리게스는 본인이 볼카노프스키를 꺾을 적임자라고 믿는다. 로드리게스는 5일 세계일보와 화상인터뷰에서 “볼카노프스키는 최고의 선수”라면서도 “이번 주 경기를 통해 내가 왜 뛰어난 선수인지를 증명할 기회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로드리게스는 “이건 말로 하는 경쟁이 아니라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한 ‘싸움’ 경쟁”이라며 “내가 준비됐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이번 주말에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로드리게스는 지난 경기에서 에멧을 이기고 꿈에 그리던 UFC 잠정 챔피언이 됐다. 2014년 말 UFC에 입성한 지 약 8년 3개월 만의 일이다. 이번 주 UFC290에선 로드리게스와 함께 UFC 대표 멕시코 파이터인 플라이급 챔피언 브랜든 모레노(30·멕시코)도 타이틀 방어전을 치른다. 로드리게스는 멕시칸 파이터 2명이 메인이벤트와 준메인이벤트를 함께 장식하는 것에 대해 “여기까지 오는 것이 엄청 긴 여정이었는데 같은 PPV에서 싸울 수 있다니 정말로 기대된다”며 “이번 주 토요일에 우리(멕시칸 파이터)가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
◆수중에 50만원도 없던 선수…밑바닥에서 최정상까지
지난 에멧전은 로드리게스가 볼카노프스키를 상대로 ‘일을 낼 수 있는 선수’라는 기대를 키워준 경기였다. 맷집이 좋은 에멧은 지더라도 피니시를 당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로드리게스는 2라운드 만에 에멧을 잠재웠다.
로드리게스는 ‘실력이 확 올랐다는 생각이 드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느냐’는 질문에 “팀메이트를 비롯해 주변 모든 사람들이 내가 더 영리하게 운동할 수 있도록 한계까지 이끌어준다”고 했다. 이어 그는 “항상 훈련 때마다 마음속으로 상대를 피니시하는 장면을 그린다”며 “지금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내가 이겼다고 생각한다”고 전의를 다졌다.
잠정 챔피언이 되고 달라진 점이 있을까. 로드리게스는 최근 톱컨텐더 반열에 오르기 전까진 재정 상황이 여유로운 편이 아니었다. 2015년 UFC 2번째 경기에서 승리한 뒤 가진 인터뷰에서 “통장에 400달러(약 50만원)가 있다고 들었는데 맞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400달러도 없다”고 답한 로드리게스였다.
로드리게스는 재정적으로는 상황이 나아졌을지 몰라도 실제로 크게 바뀐 건 없다고 했다. 그는 “멕시코에서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조금 더 알아보니까 인지도는 높아진 것 같다”면서도 “사실 크게 변한 건 없다”고 했다. 그는 “내게 인지도는 중요한 게 아니다”라며 “중요한 건 경기에서 전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흔치 않은 태권도 파이터…거리 조절에 유용해
로드리게스는 UFC에서 거의 유일하게 태권도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선수다. 태권도는 그래플링이 주된 무기인 종합격투기에서 사용하기 쉽지 않은 무술이다. 로드리게스는 5살 때 태권도에 입문했다. 복싱이 인기가 많은 멕시코에선 흔치 않은 일이다.
로드리게스는 “접근성은 복싱이 좋긴 했지만 우리 가족은 복싱이 태권도처럼 엄격하지 않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며 “태권도를 배울 때 코치가 되게 엄격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훈련 때 모든 게 제자리에 있어야 했고 운동복도 깨끗해야 했다”며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정신적 측면들이 그때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로드리게스는 “그런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게 좋다”며 “발차기뿐 아니라 그런 정신 상태를 배웠다”고 덧붙였다.
로드리게스는 태권도가 MMA에서도 유용하다고도 말했다. 그는 “(종합격투기에선) 거리가 중요하다”며 “다리를 잘 쓸 줄 알면 큰 장점이 있다”고 했다.
“다리는 매일 자신의 체중을 지탱하기 때문에 강할 수밖에 없거든요. 다리 움직임을 잘 살리고, 빠르게 움직이는 게 강점이 되죠. 다리와 팔, 팔꿈치를 사용할 때나 클린치, 그래플링을 할 때 거리 조절을 잘하는 게 중요해요. 이런 장점들이 태권도에서 온다는 거예요. MMA에선 모든 게 중요하지만 본인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그러니까 본인의 거리감각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로드리게스는 다음 달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정찬성과 할로웨이의 경기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누가 이길 것 같냐’는 질문에 “두 선수들 모두에게 존경심만을 갖고 있고 그들에게 행운이 있길 바란다”며 “승자를 예측하긴 어렵다”고 했다. 로드리게스는 “둘 다 터프하다”며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로드리게스는 오직 이번 주 경기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긴 뒤’의 행보를 묻는 질문에 “지금은 이번 주 경기만 생각하려고 한다”고 했다. 이번 주 토요일, 볼카노프스키가 이기든 로드리게스가 이기든 새로운 역사가 작성된다. 하늘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