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잃어버린 강대국 지위 회복 위해 안간힘…
옛 소련 부활 노려 우크라 안보 지속 위협할 것"
오늘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예견된 일이었다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많으나, 1990년대에 이미 그런 주장을 편 이는 드물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동서 냉전 종식을 지켜본 뒤 시작한 1990년대는 말 그대로 인류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이 지배한 시기였다. 하지만 핀란드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외교관인 막스 야콥슨(1923∼2013)은 소련이 해체된 지 불과 몇 년 만에 그 후신인 러시아 위협론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가 유럽 안보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8일(현지시간) 핀란드 대통령실에 따르면 사울리 니니스퇴 대통령은 1923년 9월 30일 태어난 야콥슨의 100회 생일을 앞두고 고인을 추모하는 특강을 했다. 그는 야콥슨이 공직에서 은퇴하고 70대에 접어든 1996년 행한 연설을 인용하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러시아는 잃어버린 위대한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옛 소련에 속했던 나라들을 러시아의 리더십 아래 다시 묶으려 들 겁니다. 유럽 안보의 관점에서 우크라이나는 일종의 신경통이 될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0년 취임한 후 러시아가 걸어 온 길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진 뒤 그간 비밀경찰 KGB에서 일해 온 푸틴 대통령은 직장을 잃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소련을 해체하기로 한 결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성토했다. 그러면서 강력한 러시아의 부활 필요성을 강조했다. 벨라루스 등 옛 소련 구성국 일부는 진작 러시아 휘하에 들어갔다. 우크라이나가 이를 거부하자 2022년 2월 전격 침공을 단행해 벌써 1년 7개월 이상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니니스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이는 잔혹한 전쟁은 야콥슨의 예측이 얼마나 옳았는지 보여준다”며 “러시아는 폭력적·불법적 방식을 동원해 이웃나라들을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가 국제법의 초석인 주권 존중과 영토 불가침의 원칙을 뒤집으려 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는 유럽 안보의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허락한다면 다른 나라들도 잠재적으로 따를 수 있는 위험한 선례로 남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평화가 우선이라며 우크라이나가 영토 일부를 러시아에 양보하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를 반박한 셈이다.
니니스퇴 대통령이 높이 평가한 야콥슨은 원래 BBC 기자로 출발해 언론인의 길을 걷다가 30세이던 1953년 핀란드 외교부에 들어갔다. 소련과 긴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군사적 중립 노선을 표방하는 핀란드 입장에선 외교관의 역할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유엔 주재 핀란드 대사를 지낸 야콥슨은 1971년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도전해 다수 국가의 지지를 얻었으나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좌절됐다. 결국 사무총장직은 오스트리아 외교관 출신 쿠르트 발트하임(훗날 오스트리아 대통령 역임)한테 돌아갔다.
비록 유엔 사무총장의 꿈이 무산됐으나 야콥슨은 외교관으로 남아 1971∼1974년 주(駐)스웨덴 핀란드 대사를 역임했다. 공직을 그만둔 뒤에도 핀란드 안보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주핀란드 대사(1996∼1998)를 지낸 이인호 전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은 “핀란드에 대사로 부임해 여론 지도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한결 같이 막스 야콥슨이란 답이 돌아왔다”며 “나토 가입 등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핀란드인들은 가장 탁월한 지성인이란 평가를 받는 야콥슨의 의견부터 들어보고 그것을 중심으로 국민 토론을 시작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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