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동은 어린 시절에 ‘논어’를 처음 보고 “대성현(大聖賢)의 글의 모두(冒頭)로 너무나 평범한 데 놀랐다”고 했다. 그 후 배우고 익히고 가르치는 생활을 이삼십 년 한 뒤에야 그 말이 진리임을 “몸에 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공자의 당초 소박한 표현이 그대로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다”고 덧붙였다. 말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지만 사무치게 받아들일 만한 힘이 담겨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학계에선 배움(學)의 열정이 담긴 이 첫마디를 ‘논어’ 전편의 강령으로 받아들인다.
‘논어’는 2500년 전 중국 춘추시대에 공자가 죽은 뒤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모아 만든 책이다. 유가(儒家)의 성전(聖典)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전 필독서다. ‘(진리를) 논하고 말하다’라는 뜻을 지닌 ‘논어’의 첫 부분에 배움이 놓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다산 정약용은 ‘논어’ 주석서인 ‘논어고금주’에서 “학(學)이란 가르침을 받는 것이고 습(習)이란 학업을 익히는 것이며 시습(時習)이란 수시로 익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면 어느 순간 문리(文理)가 트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배움이라는 말은 동아시아 문명을 지탱해 온 힘이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며 배움에 대한 간절함을 드러낸다. 배움이야말로 삶 자체인 것이다.
박완규 취재담당부국장 |
‘논어’의 다음 구절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으니 군자(君子)가 아니겠는가”로 이어진다. 군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배움의 목적은 군자가 되는 데 있다. 군자는 원래 신분이 높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공자 시대에는 덕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공자는 군자를 호학(好學)의 인간이라고 본다. “군자는 배부르게 먹는 것과 편안한 거처를 바라지 않고, 일에 민첩하고 말을 삼가면서, 도(道)가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 이만하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즐기는 것이 인간의 길이라는 가르침이다. 공자는 도덕적 인간인 군자로 가득한 세상이 되면 인간 질서가 제자리를 잡을 것으로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한 가족처럼 평화롭게 사는 유토피아를 꿈꾼 이상가였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공자가 제시한 배움의 길을 청소년들에게 알려주고 싶지만, 실로 난감하다. 엊그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수험생들에게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않겠는가”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다. 무한 경쟁에 휘둘리면서 가르침이 실종된 우리의 교육 현실은 답이 보이지 않는다. 배움에 관해 길을 잃은 지 오래다. 왜,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면서 앞으로 내달리기만을 강요당하는 아이들에게 위로의 말밖에 할 수 없다. 교육에 관한 한 기성세대는 잘못을 인정하고 깊이 반성해야 한다.
박완규 취재담당부국장
‘
후마니타스(humanitas)’는 ‘인간성, 인간다움’을 의미하는 라틴어다. 교양, 교육 등을 뜻하기도 한다.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인 ‘인문학(humanities)’의 어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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