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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의후마니타스에세이] 정의를 다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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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2-07 20:29:12 수정 : 2014-02-07 20:3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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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는 정의에 대한 성찰로
현실정치의 혼란을 극복하려는 시도
몇해 전 미국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켰다. ‘정의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오고, 사회 각계의 필독서로 꼽혀 중고생에서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독후감을 냈다. 미국도 아닌, 한국에서 유독 큰 인기를 누려 저자가 놀라기도 했다. 지금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다. 우리 사회에 정의에 대한 열망이 끓어올랐기 때문이라는 막연한 분석만 낳았다. 샌델 교수는 책에서 수많은 질문을 하고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정의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답은 없고 이에 대해 생각하는 길잡이 구실을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BC 427∼BC 347)도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많은 글을 남겼다. 실존 인물들을 등장시켜 이들의 대화 형식으로 글을 썼다. 그가 던진 화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다. 후대 서양철학의 뼈대가 됐다. 저서 ‘국가(Politeia)’에서는 ‘정의(올바름)란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를 펼쳤다. 궁극적인 질문은 ‘왜 우리는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가’다.

박완규 취재담당 부국장
‘국가’의 초반부에서 당대의 저명한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단언한다. “정권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법을 제정하고, 일단 법을 만들면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국민에게 올바른 것이라고 선언한다”는 것이다. 대화의 주인공 소크라테스는 “진실로 ‘참된 통치자’는 본성상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걸 생각하지 않고, 다스림을 받는 쪽에 이익이 되는 걸 생각한다”고 반박한다. 통치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위한 행위이며, 피치자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결국 통치자에게 이익이 되고 정의로운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대화 주제는 정의로운 국가로 바뀐다. 개인이 아무리 올바르게 살려고 해도 국가가 타락하면 그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인과 국가는 이처럼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며 같은 운명을 지닌다. 개인이 정의를 실현하려면 정치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플라톤은 이를 통해 개인 이익과 공동체 이익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국가의 구성 원리를 제시했다.

플라톤 시대의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정치적 혼란기였다. 민주주의 황금기가 막을 내리고 비열한 정치가 판치던 시대였다. 무자비한 정치투쟁과 도덕적 혼란, 지적 궤변이 성행했다.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한 것도 이때다. 같은 시기에 활약한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그 시대가 정치적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흔히 쓰는 단어들의 의미를 바꿔놓았다고 한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정의란 무엇인가’, ‘선(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올바른 정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고대 아테네 혼란기와 오늘날 우리 사회는 유사점이 많다. 말을 허투루 쓰는 정치인이 많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정치권은 끊임없이 말의 전쟁을 벌이지만, 국민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플라톤의 본을 받아 질문 형식을 취해보자. 정치인이 쓰는 말의 의미가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가. 여야가 쓰는 말은 의미가 서로 다른데 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관심이나 있는가. 원론적인 질문 하나 추가하자. 과연 정치인만의 문제인가. 우리 사회 각 분야가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그런 것 아닌가.

정치적 측면에서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해주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합의다. 합의는 대화와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대화의 말을 잃어가고 있다. 더욱 나쁜 일은 공유할 수 있는 원칙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데 있다. 우리 사회의 갑작스러운 정의 신드롬이 한편으로 꺼림칙한 이유다. 플라톤은 당대의 현실 정치가 안고 있는 문제를 정의에 대한 성찰로 극복하려 했다. 우리는 정치가 국민에게서 외면받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난국을 도대체 무엇으로 헤쳐 나가려는가.

박완규 취재담당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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