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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문학노트] 메르스라는 이름의 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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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6-12 21:38:30 수정 : 2015-06-12 21:3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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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무능이 부른 공포에 갇힌 한국
타인에 피해 안 주려는 최소한의 배려 퍼질 때
메르스와 전쟁서 승리할 수 있을 것
베이징에서 쓴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 문인들이 동아시아 미래와 평화를 도모하는 동아시아포럼 취재를 위해 어제(11일) 들어왔다. 한국을 떠날 때 중국 입국 절차가 만만치 않을 거라고, 한국 승객들은 따로 격리해 철저히 검역 절차를 거친 뒤 들여보낼 것이라고 걱정하는 이들이 있었다. 어느 정도 수모는 각오했다. 메르스 감염 의심 환자를 아무런 제지도 없이 자기네 나라로 출국시킨 나라의 국민이니 자존심이 상해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로 여겼다. 예상과 달리 베이징 관문 서우두 국제공항 입국 심사대는 한국에서 온 단체 승객들을 심상하게 통과시켰다. 스모그로 유명한 베이징 시내는 비가 그친 뒤여서 이날따라 쾌청했다. 시민들은 맑은 햇빛 속에서 여유롭게 시내를 활보했다.

문득 한국인만 감옥에 갇혀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자가격리자는 물론 아직 안전한 이들조차 모두 언제 메르스에 감염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형국 아닌가. 감옥이 물리적 담장 안에만 있는 건 아니다. 한때는 사스 바이러스 때문에 경계했던 나라에 와서 이제는 거꾸로 메르스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을 생각하는 착잡함이라니. ‘메르스 전쟁’은 초기에 당국이 제대로 대응했더라면 지금처럼 확전되지 않았으리라는 진단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전염병을 다룬 문학 작품들도 재앙에 이르는 사태의 요인으로 초기 대응 실패를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런 유형의 대표적인 소설로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작품이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의 ‘페스트’다. 1940년대 알제리 항구도시 ‘오랑’을 무대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의심스러운 열병이 확산되자 당국은 회의를 열고 “현실적으로 우려할 만큼 특징이 규명된 상태가 아니며 또한 시민들이 냉정을 잃지 않으리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 바”라면서 다만 신중을 기하는 의미에서 주변을 청결하게 하라고 벽보를 시내 곳곳에 붙인다. 하나 마나 한 발표인데 이 경우에도 당국은 여론을 자극하지 않는 것에만 먼저 역량을 집중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거론되는 미국의 거장 필립 로스(82)는 그가 마지막 작품이라고 언급한 근작 ‘네메시스’에서 ‘폴리오’ 바이러스와 사투를 그려냈다. 2차세계대전 막바지인 1944년 미국 뉴어크를 무대로 전개되는 이 작품에서 한때 6000명 이상을 사망하게 했던 이 바이러스가 다시 창궐하리라고 당국은 예상하지 못한 채 시민들에게 “적절한 위생적 예방조치를 취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리 불안해할 이유는 없다”고 발표한다. 세월이 흘러도 같은 행태는 되풀이된다. 21세기 한국의 메르스 사태에서도 당국은 손을 자주 씻고 마스크를 쓸 것이며 낙타와 접촉하지 않으면 된다고 안이하게 되풀이했을 따름이다.

일차적인 바이러스 차단 책임은 당국에 있지만 시민의 태도도 똑같이 중요한 건 두말할 것 없다. ‘네메시스’의 주인공 버캔 캐너라는 스물세 살 건장한 청년은 자신이 주로 아이들에게만 감염된다는 바이러스를 지닌 건강한 보균자임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청소년들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나중에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은 물론 애인의 쌍둥이 여동생까지 감염돼 죽거나 고통에 시달리자 뒤늦게 자신이 바이러스를 옮긴 ‘보이지 않는 화살’이었다고 자책한다. 그가 바이러스를 옮긴 게 아니라 거꾸로 아이들에게서 옮았을 가능성도 충분한데 그는 자신에게 스스로 형벌을 내려 사랑하는 이들과 절연한 채 쓸쓸하게 홀로 늙어간다.

과도한 자책도 문제지만 최소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상식적인 태도만으로도 작금의 메르스 전쟁을 끝내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고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한 교훈을 주기 위해 다시 쥐들을 흔들어 깨울 것이라는 카뮈의 경고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입증되는 형국이다. 메르스는 작금의 한국을 통째로 감옥에 가둔, 무책임과 무능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질병인 것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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