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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분단 70년, 대한민국 다시 하나로] “노예같은 생활에 사회적 매장… 철저히 속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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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7-21 21:01:11 수정 : 2015-07-21 23: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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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북송사업 때 北갔다 43년 만에 탈북한 가와사키씨
“교토의 조선학교에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대해 배웠고, 당시만 해도 민주주의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이론으로만 배울 게 아니라 직접 체험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족의 반대를 꺾고 혼자서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 청진항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런데 북한에 도착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지난 14일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만난 가와사키 에이코(73·川崎榮子·사진) ‘모두모이자’ 대표는 고교 3학년이던 1960년 ‘귀국운동’(북송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갔을 때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재일교포 2세로 북한 생활 43년 만인 2003년 탈북해 중국에 머물다 2004년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비정부기구(NGO) 모두모이자를 통해 탈북자의 일본 정착을 돕고 있다.

가와사키 대표는 “청진항이 가까워지면서 환영 나온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얼굴은 새까맣고, 피부는 거칠고, 입은 옷은 너무 초라해 가난이 배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일본에 있을 때 조총련으로부터 ‘살고 싶은 데 살고, 하고 싶은 일 하고, 주택은 국가로부터 무상으로 받고, 학교와 의료는 무료로 이용하고, 기본적 생활수준은 보장돼 있다’고 들었다”며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와사키 대표는 “북한은 철저한 계급사회인데 일본에서 간 사람은 맨 밑바닥에 놓였다”며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사람이라는 이유로 북한 주민들이 자기에게 피해가 있을까 걱정해 말도 걸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당시 국가공무원, 경찰, 군인이 될 수 없었다”며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노예 같은 생활밖에 할 수 없어 사회적으로 매장됐다”고 전했다.

그는 “처음에는 조총련이 이런 현실을 몰라 아무런 조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조총련은 9만3340명이 북한에 갈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고,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함흥 화학공업대를 졸업해 기계공장에서 설계 엔지니어로 일했고, 직장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해 5명의 아이를 낳았다. 북한 경제가 무너져 자영업이 묵인됐을 때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악착같이 살던 그가 탈북을 결심한 것은 “굶어 죽은 사람의 시체가 여기저기에 나뒹구는 상황인데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온 나라 청장년을 불러모아 김일성 주석의 무덤(금수산태양궁전)을 만드는 데 돈을 쏟아붓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더는 못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와사키 대표는 탈북 후 북한의 인권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일본사무소의 도움으로 국제사회에 북한의 인권 상황을 폭로했고, 지난해 2월 유엔 북한인권특별조사위원회가 북한인권보고서를 내는 데 힘을 보탰다. 올해 4월에는 미국 의회에서 강연했고,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북한 인권 행사에도 참석했다.

가와사키 대표는 과거 북송사업에 관여한 일본 정부 등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북송된 재일교포 본인과 가족의 일본 자유여행을 북한 정부가 허용하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북송 피해자들의 인권구제를 위해 오는 9월부터 일본변호사연합회가 본격적으로 나설 예정이다.

도쿄=글·사진 우상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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