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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열의경제수첩] 각자도생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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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9-11 20:28:50 수정 : 2015-09-11 20:2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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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뿐인 경제민주화, 무능정책에 불신 커져
증세 없는 복지에 재정마저 악화일로
못 믿을 정부에 상실감, 제 살 길 알아서 찾아야
각자도생은 이 시대의 생존 지침으로 굳어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가르치고 메르스 사태가 복습시킨 교훈이다. 기울어가는 배 안에서 승객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았어야 했다. 구멍 뚫린 방역망을 넘어 연기처럼 퍼지는 바이러스도 각자 알아서 피해야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정부는 존재감을 잃었다. 매번 골든타임을 놓치며 무능을 드러냈다. 각자도생은 국민이 좋아서 선택한 게 아니다. 정부의 무능이 강요한 불가피한 선택일 뿐이다.

재난 대응만이 아니다. 각자도생을 부추기는 무능은 정부 정책 곳곳에 숨어 있다. 박근혜정부 2년반의 경제정책 흐름을 훑어봐도 그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대선공약인 경제민주화는 시늉만 하다 팽개쳤다. 양극화를 해소해 내수기반을 다지고 성장잠재력을 키운다는 장기비전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빚 내서 집 사라”로 요약되는 단기부양책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경기가 살아났다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으니 문제다.

류순열 선임기자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었지만 풀린 돈은 생산적인 곳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빚을 내 집을 사고 주식에 투자하면서 자산시장만 부풀어올랐을 뿐이다. 금융권 고위인사는 “질이 아주 나쁜 악성부채만 키운 것”이라고 평했다. 가계부채는 6월 말 기준 일반가계 부채 1130조5000억원에다 소규모 자영업자 부채 222조9000억원을 더해 1353조4000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명목 가계가처분소득(838조3000억원)의 1.6배가 넘는다. 성장속도는 바닥인데 가계부채는 계속 급증하고 있으니 지금도 그 비율은 상승하는 중이다. 한국 경제의 뇌관인 가계부채의 폭발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풀린 돈이 성장을 견인하지 못하면서 저금리의 부작용은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저금리에 기대 연명하는 좀비기업이 효율적 자원 배분을 방해하고 저금리 탓에 치솟는 주거비에 짓눌려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이쯤 되면 누구를 위한 금리 인하였는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애당초 가계빚에 의존한 경기부양 정책은 모험이었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금리 내리고 돈 풀어 경기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으면 무슨 걱정이냐”며 개탄한 적이 있다. “통화정책은 단기와 장기의 바꿔치기일 뿐”이라는 게 그의 설명인데, 반짝 단기 부양효과를 보는 대신 장기 위험을 키우게 된다는 말이다.

돈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다. 불황으로 민간의 소비여력이 바닥나면 정부가 재정을 확 풀어 총수요를 끌어올리는 것은 마땅한 처방이다. 당장은 나라 곳간이 바닥이 나고 빚이 늘겠지만 경기가 살아나면 세수가 더 걷히면서 곳간은 다시 채워질 것이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지속된 케인스식 경제위기 해법이다. 문제는 정부가 이런 정공법 대신 손 안 대고 코 풀듯 가계빚을 늘려 경기를 띄우려 했다는 데 있다. 정부 재정이 해야 할 일을 가계 부채에 떠넘긴 셈이다. 정부로서는 국회 승인을 받아야 하는 재정정책보다 한은을 압박해 기준금리를 낮추는 편법이 만만했을 것이다.

그나마 이제 막바지다. 통화·재정정책 모두 ‘실탄’이 거의 떨어졌다. 미국 금리 인상이 코앞인데 한은이 기준금리를 더 내리기는 쉽지 않다. 상대적으로 건전한 정부 재정도 ‘증세 없는 복지’에 발목이 잡혀 갈수록 악화할 수밖에 없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공직을 맡고 있는 한 경제학자는 “정부에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없다”면서 발상의 대전환을 역설했다. “예컨대 500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기금을 주택임대시장 투자로 연결만 시켜도 주거부담과 가계부채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은 못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창의적 발상의 부재 이전에 불신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신뢰를 잃으면 좌초하고, 그런 환경에서 각자도생의 의식은 더욱 또렷해질 것이다. 각자 살 길을 찾겠다는 생각이 굳어지는 것은 우리가 신뢰가 무너진 시대를 살고 있다는, 서글픈 증거다.

류순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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