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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살림·공부까지… 당당한 엄마 모습 보여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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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1-31 19:21:28 수정 : 2016-02-01 13: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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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출신 열혈 워킹맘 김순미씨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죠.”

베트남 출신 결혼 이민자 김순미(39·사진)씨는 부산 북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통·번역 업무 등을 담당하고 있는 열혈 ‘워킹맘’이다. 2013년부터는 부산 사이버대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있다. 아동복지에 관심이 많아 관련 공부를 계속하는 중이다. 지난해엔 아동공동체 실습도 나갔다. 졸업 후 베트남 결혼이주여성과 그들의 가정을 위해 일하는 것이 목표다.

20일 부산 북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만난 김씨는 “일에 살림, 공부까지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우리 가족과 같은 다문화가정이 한국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돕고, 아이에게 당당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싱긋 웃었다.

김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 진학에 필요한 학비를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베트남 호찌민의 한 공장에서 그 공장을 운영하던 남편을 만났다. 2000년 결혼하면서 호찌민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다음해 아들을 낳은 후 2005년 한국에 왔다.

한국어를 잘하지 못한 탓에 처음 3년간은 집에만 있었다. 때때로 외로움을 달래려 베트남을 오갈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한국어교실에 다녀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우연히 베트남어로 대화하는 사람들을 본 모양이더라고요. 같은 나라 사람들도 만나고, 한국어도 배우면 좋지 않겠냐기에 그러겠다고 했죠.”

남편이 준 버스번호가 적힌 종이 한 장만 보고 금곡3동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한국어교실을 찾았다. 그때부터 매일 한국어공부를 했다. 주민센터는 일주일에 두 차례만 교실을 열었기 때문에 다른 주민센터 등에서 운영하는 한국어교실에도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어능력시험 3급에 합격할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부쩍 늘었다.

육아와 살림을 하면서 동 주민센터와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출입국관리사무소, 경찰서, 종합병원 등에서 통역 일을 하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결혼이주민 여성 나라의 동화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엄마나라 동화나라’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동화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런 경력으로 같은 해 5월 부산 북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 통·번역 지원사로 취직했다. 주로 자신과 같은 이주여성이나 근로자들이 문화차이, 정보부족으로 겪는 어려움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친언니처럼 이주여성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상담해주기도 한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건 쉽지 않았다. 아침은 지금도 전쟁을 방불케 한다. 오전 6시40분에 일어나 아이와 남편을 깨워 아침밥을 챙기고 등교시킨 뒤 출근한다. 그것만으로 진이 빠진다. 오후 5시에 퇴근하면 시장을 보고 청소하고 요리한다. 아들의 공부를 챙기고, 자신도 공부한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오전 1시. 여느 한국 워킹맘들과 다르지 않다.

한국인 엄마들은 조부모나 친척이 아이를 맡아주기도 하지만, 김씨는 육아를 도와줄 사람이 전혀 없었다. 친정 부모는 베트남에 있고, 시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선 퇴근 후 육아와 살림을 도왔던 남편은 한국에 온 이후 가끔 돕는 정도가 됐다. 김씨는 “일·가정의 양립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은 베트남보다 뒤떨어진다”며 “사회시스템도 문제지만 가사와 육아부담이 여성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인식도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아이 문제였다. 한국 입국 당시 5살이던 아들이 알고 있는 한국어는 ‘안녕하세요’가 전부. 어린이집을 다녀온 아들의 말은 김씨 부부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아들이 베트남어로 ‘엄마, 내 이름이 왜 베트남이야?’라고 묻더군요. 또래 친구들의 놀림도 심했고, 학부모들의 이상한 시선도 불편했습니다. 밝았던 아들의 말수는 점점 줄어갔습니다.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죠.”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김씨는 교통봉사, 각종 교내 봉사활동, 공개수업 등 모든 모임과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른 학부모들과도 열심히 교류했다. 다문화가정도 여느 한국 가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남편은 아들의 한국어교육을 맡았다.

아들의 친구들은 이제 더는 아들을 ‘베트남’으로 부르지 않는다. 형제 같은 절친한 친구도 생겼다. 현재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은 부반장을 맡을 정도로 학교생활을 잘 해 나가고 있다. ‘평화인’이란 별명이 생겼다고 한다. 한국와 베트남 양쪽의 문화를 모두 받아들이며 자라고 있다.

아들의 교육은 학교에 전적으로 맡기고 있다. 태권도 학원을 제외하면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태권도 학원은 아들이 원해서 다니는 것이다. 김씨는 아들이 되도록 많은 문화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는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돕고 베풀 줄 아는 건강한 정신을 지닌 어른으로 자라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주 여성들에게 “한국사람들과 소통하려면 필요한 것은 ‘말’”이라며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다양한 제도가 있는 만큼 많이 배우고, 먼저 다가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녹아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일을 가지는 것도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김씨는 “이제는 한국도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됐다”며 “한국인들이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대한민국은 더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이보람 기자 bora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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