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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열의경제수첩] 전직 경제장관 K의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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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3-04 21:41:12 수정 : 2016-03-05 00: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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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가 좀 나아진 건
그나마 부채를 줄인 덕분
가계빚 잔뜩 늘린 우리 경제
한겨울 눈보라 몰아치는데
버틸 힘도 없이 내복 벗은 꼴
“전쟁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경제부처 장관을 지낸 K씨는 비관적이었다. 작금의 경제위기를 1929년 대공황보다도 더 풀기 어려운 문제로 봤다. 80여년 전 공급과잉이 초래한 경제위기는 끝내 전쟁(2차대전)을 몰고 왔다. 경제정책으로 풀리지 않던 경제적 모순은 이 거대하고 참혹한 전쟁을 통해,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르고 비로소 해소됐다.

전쟁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지만 역설적이게도 경제를 살리기도 한다. 인력과 물자가 총동원되면서 완전고용 상태가 되고 시장은 다시 활기를 띤다. 전쟁은 그렇게 총수요를 단번에 확 끌어올려 경제를 다시 팽팽 돌린다. 1차대전 배상 책임에 짓눌려 피폐해진 독일이 전쟁으로 경제를 다시 돌렸듯이 원자폭탄의 폐허에 넋 놓고 주저앉았던 패전국 일본도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류순열 경제부 선임기자
역사는 때로 반복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지루하게 침체의 터널을 헤매면서 다시 전쟁 가능성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잖다. 터널에 갇힌 경제가 출구를 찾지 못하면 결국 닫힌 공간의 가스처럼 어느 순간 펑 터질 수 있다는 것이다. 누적된 경제적 모순이 정치·외교적, 또는 종교적 갈등과 결합한다면 강렬한 불씨가 될 것이다. 저명한 경제학자 J, 관록 있는 애널리스트 L, 그리고 전직 장관 K 모두 “가능성이 있는 얘기”라고 했다.

문제는 그런 비극이 재연된다고 경제가 출구를 찾을 수 있느냐인데, K는 “그때와는 다르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총수요를 끌어올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세계 경제는 과거 경험한 적 없는 미지의 영역에 들어선 상태다. 유럽과 일본 등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경제의 25%를 차지하는 경제권의 정책금리가 ‘마이너스’다. 돈을 맡기면 이자를 주는 게 아니라 보관비용을 물릴 테니 돈을 풀고 쓰라는 다급한 메시지다. 중앙은행과 민간은행 간 거래, 국채발행 등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기는 해도 경제학을 다시 써야 하는 초유의 사건이다. 여타 각국 중앙은행들도 경쟁적으로 금리를 낮추며 경기를 살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효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지의 영역에서 불확실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린다는 처방엔 의문부호가 붙은 지 오래다. 돈만 마구 푼다고 투자와 소비가 느는 게 아님은 수년간의 경제 흐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마이너스 금리까지 간 아베노믹스에도 실패의 그림자가 짙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려 가던 길 계속 가는 상황”이라고 어느 경제학자는 진단했다. ‘지도에 없는 길’을 열심히 달린 한국 경제도 속도에 차이가 있을 뿐 마찬가지 흐름이다.

K의 한숨이 터진 건 이 대목이다. 가계빚에 기댄 경기부양으로 뇌관을 잔뜩 키워놓은 정부 정책에 대한 걱정에다 부실 제거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회한이 겹쳤다. 재임 시 그가 제시한 처방은 지금 정부의 해법과는 정반대였다. K는 성장률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금리를 올려 급증하는 가계부채부터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을 지키려면 폭풍이 몰아치기 전 미리미리 삐거덕거리는 창문은 고치고 낡은 지붕도 손봐야 한다는 논리다. 성장률 포기를 감수하는 담대한 처방을 실행하지 못한 채 경질되고 말았지만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K는 “미국 경제가 그나마 좀 나은 건 부채감축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가계부채만 잔뜩 늘린 꼴인 정부정책이 어떻게 비칠지는 자명하다. 그는 부동산금융 규제(LTV, DTI)에 대해서도 “그게 왜 ‘한겨울에 입은 여름옷’인가, 한겨울의 내복이지”라며 혀를 찼다. 2014년 8월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가 ‘한겨울의 여름옷’에 빗대며 규제완화를 밀어붙인 것을 겨냥한 비유다. 한국은행 고위관계자도 “세월호 참사 여파로 기준금리 인하를 검토하던 중에 정부가 LTV, DTI 완화를 발표하기에 아차(일났구나) 싶었다”고 당시 심경을 밝힌 적이 있다. 금리도 내리고 대출규제도 풀면 가계부채가 급증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K의 걱정처럼 우리는 한겨울 폭풍이 몰아치는데 체력은 키우지 않은 채 내복을 벗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가계부채는 지난해 말 1400조원 중반대를 지나 1500조원을 향하는 중이다.

류순열 경제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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