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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문학노트] 시 쓰는 할매들의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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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6-03 22:10:12 수정 : 2016-06-03 22: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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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갓 배운 칠곡 할머니들
스스로 지은 창작시 낭송에
현란한 기교는 없지만
가슴 연 진솔한 삶의 언어들
이것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문학의 고갱이 아닐까
지난달 말 이야기경영연구소에서 주최한 ‘칠곡 시 낭독열차’를 타고 경북 칠곡 할매들이 시를 쓰는 마을에 다녀왔다. 예전에 시라 함은 선비들이나 일부 특별한 여성들이 쓰는 것으로 알았던 장르가 아니던가. 할매들, 그것도 ‘언문’을 막 배운 이들이 시를 썼다면 놀랍고 궁금할 법도 하다. 맞다. 그들이 시를 썼고 지난해 말 시집을 엮어내 시집 치고는 베스트셀러에 가까운 6쇄 6500부나 찍었다니 대단한 성공인 셈이다. 그들 중 일부를 찾아 서울에서 기성 시인과 독자들 70여명이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칠곡군 약목면 남계마을 신유 사당 앞 잔디밭에 차일을 쳐놓고 그 아래 독자들이 앉아 앞쪽 사당 추녀 아래 앉은 할매들을 바라보았다. 할매들은 순서대로 마이크 앞에 나와 자신이 지은 최근 창작시를 낭송했다. 약목면 복성2리에서 온 곽두조 할매는 ‘나는 백만장자’라는 시를 읊었다. “아이고 잘 있는교/ 내 혼자/ 당신 새끼 다 키우고/ 내 혼자/ 눈물반 콧물반/ 그래 살았다/ 4남매 데리고/ 시어머니 모시고/ 내 할 일 다 하고/ 인자는 나는 백만장자구나/ 그만 만나도록 가끄이요/ 내 가도록 쪼매만 기다리시오” 할매가 ‘쪼~매만 기다리시오’라고 읊을 때 좌중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요즘 유행어로 표현하자면 ‘웃픈’ 웃음이었을 것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박월선 할매는 “사랑이라카이/ 부끄럽따/ 내 사랑도/ 모르고 사라따/ 절을 때는 쪼매 사랑해조대/ 그래도 뽀뽀는 안해밧다”고 ‘사랑’을 읊었다. 사회자가 짓궂게 “할매 진짜 뽀뽀 안 해봤능교”라고 했더니 “옛날이라 진짜 못해봤다”며 웃었다. 맞춤법 사투리 모두 무시하고 갓 한글을 깨친 할매들이 진솔하게 지은 시들이었다. 칠곡군 약목면 87세 박금분 할매는 “서울 아들이/ 약목 말을/ 쓰지 말라칸다/ 할매말 몬알아듣는다고/ 약목 말을 쓰지 말라칸다/ 에헤이/ 나도 느그말 모리겠다/ 약목 할매캉/ 서울아들캉 서로 모리/ 이 일을 어짤꼬”라고 익살스럽게 ‘약목 말 서울 말’을 지어 읊었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서울 아그들이 못 알아듣겠다고 하니 이 할매도 느그말 못 알아듣겠다고 어깃장을 놓는 장면이다.

시라는 것이 고고하게 천상에서만 누리는 장르는 아니다. 진솔하게 가슴을 열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토로할 때 다른 이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 진정성의 힘이야말로 시의 가장 큰 동력일 터이다. 칠곡군에서는 2006년부터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들에게 성인 ‘문해교육’을 실시해왔다. 다른 곳과는 달리 마을회관이 학교가 되는 시스템을 운영해왔다. 그리하여 그동안 글을 깨친 할매들 84명의 작품 89점을 지난해 ‘시가 뭐고?’라는 시집으로 엮어내 화제가 되었다. 올 연말깨에는 할매들의 새 시집도 나온다. 칠곡군은 전체 200개 마을 중 19개 마을을 ‘문학마을’로 지정해 할매들의 한글 공부와 시 쓰기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올해는 5개 ‘문학마을’이 더 신청해 곧 추가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 할매들은 대부분 한국 현대사의 파란 많은 구비들을 관통해온 이들이다. 박후불 할매는 “마을회관 한글 공부/ 내 눈을 뜨게 하고/ 흐리게 보였던 간판이/ 환하게 보인다”라고 시를 썼다. 시력이 약해서 간판이 흐리게 보인 것뿐 아니라 한글을 모르기 때문에도 흐렸던 것인데, 한글을 알게 된 지금은 이제 그 간판이 환해졌다는 것이다. 도필선 할매는 포도농사를 짓는데 포도알에서는 ‘ㅇ’이 보이고 이파리에서는 ‘ㅍ’이 보인다고 시를 썼다. 현란하고 지적인 언어로 시를 구사해 일부 아는 이들끼리만 공감하는 현대시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삶 속에서 진솔하게 건져올리는 이런 시야말로 문학의 고갱이가 아닐까.

그날 낭독열차 행사의 마지막에 등장한 강금연 할매 시인은 신작시 ‘아들아’를 읽고 나서는 “자꾸 눈물이 날라칸다”면서 울먹였다. 그 시, 사투리가 심해서 잘 못 알아들었는데 번역을 곁들이면 이쯤 된다. “내 아들 나가 시끈 물도(내 아들 낳아서 씻긴 물도)/ 안 내삐릴라 캐다(안 내버릴라고 했다)/ 그 아들 노코(낳고) 얼마나 조아는데(좋았는데)/ 이제 그 아들한태(아들에게) 미안하다/ 내 몸띠(몸둥이)가 성하지를 모타니(못하니)/ 아들 미느리(며느리) 욕빈다(욕보인다)/ 자나깨나 걱정해주는/ 아들이 참 고맙다.” 누구나 마음을 열면 시를 쓸 수 있다는데 누구나 마음을 열기는 쉽지 않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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