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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영조의 유공자 후손 특채 ‘충량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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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6-07 22:01:30 수정 : 2016-06-07 2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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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가문 우대… 시험장 나가 직접 격려
호국보훈의 달, 나라사랑 정신 계승 나서야
6월 6일 현충일과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6월은 어느 달보다 많은 사람을 숙연하게 한다.

2010년에는 6월 1일을 ‘의병(義兵)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인 6월 1일로 선정한 것이다. 이처럼 6월은 위기의 시기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에게 감사하고, 국방과 안보에 대한 보다 세심한 대비를 다짐하게 한다.

조선시대에도 왜란과 호란이라는 초유의 국가적 위기를 당한 후 전란 당시 희생당한 사람의 현창 작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공자에 대한 포상 및 이들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을 설치했는데 충렬사(忠烈祠), 의열사(義烈祠), 포충사(褒忠祠), 충민사(忠愍祠), 현충사(顯忠祠)로 이름이 지어진 사당 대부분은 전란으로 희생당한 인물을 제향하는 곳이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차원에서 19세기에는 ‘임진전란도(壬辰戰亂圖)’를 제작해 보급하게 했다. 그림에서는 근경(近景)의 다대포진과 원경(遠景)의 부산진 두 성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장면을 담고 있다.

영조대에는 국가에 충절을 지킨 후예들을 특별히 채용한 시험인 충량과(忠良科)를 실시했다. 나라에 충성을 한 후손에 대한 배려였으며, 이들 제도의 시행을 통해 국가에 충성하는 인력을 계속 발굴해 내려는 뜻도 담겨져 있었다. 1764년(영조 40) 1월 영조는 충신과 의사의 마음을 위로한다는 취지에서 충량과라는 시험제도를 실시했다. 이해 2월 8일에는 직접 충량과 시험 현장에 나아가 응시자를 격려하기도 했다. 왕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충량과에 직접 참석하고 이어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충량과의 성적을 매겨 김노순·김장행·김이소 등 3인을 뽑았는데, 무과에 합격한 자도 14인이었다. 왕이 말하기를 “선원(仙源·김상용)·청음(淸陰·김상헌)의 후예는 모두 참방(參榜)했는데, 유독 삼학사(三學士)의 후예가 없는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 병자호란 때 충절을 지킨 김상용과 김상헌의 후손이 합격한 것을 기뻐하고 이때 심양으로 끌려가 희생을 당했던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후손이 없음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영조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충량과를 실시해 국가 유공자 자녀를 특채하는 시스템을 자리 잡게 했다.

이 같은 사례처럼 오늘날 국가보훈처에서 주로 담당하는 국가 유공자 포상 사업이 조선시대에도 시행됐다.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사당의 건립, 기록화를 통한 순절 활동 홍보, 특별 채용 시험을 실시해서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하는 것 등 다양한 경로로 유공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과 후손에 대한 예우를 지속함으로써 궁극에는 위기의 시기 국가에 충성하는 인물을 배출하게 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역사 속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인물을 기억하고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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