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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문학기행] 기다림은 창조의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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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6-23 21:30:34 수정 : 2016-06-23 21: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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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아픔 예술로 승화한 ‘청포도’
과연 우리는 절실한 맛과 향기를 알까
배낭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기다림의 달인이 돼 간다. 열차나 비행기가 지연되는 일도 다반사, 각종 매표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기다림의 비결 중 가장 시간 잘 가는 것은 독서였는데, 한 번은 베니스역에서 책에 집중하다가 배낭을 통째로 도둑맞은 일이 있었다. 그때 ‘뜨거운 맛’을 본 후로는 독서로 기다림을 대체하기보다는 기다림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려 애쓴다.

기다림 자체에 몰두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무력하고 수동적인 기다림은 고통뿐이었다. 급기야 기다림에 지친 나는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여행스케줄과 집필계획만 생각하느라 미처 곁눈질할 겨를이 없던, 낯선 타인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응애응애 우는 아기를 둥개둥개 달래는 지친 엄마, 어린 아들을 혼자 기차에 태워 멀리 떠나보내야 하는 엄마의 눈물, 헤어지기 싫어 마치 세상이 끝날 것처럼 간절히 부둥킨 채 떨어지지 않는 연인. 내 일도 아닌데 그런 풍경을 보면 코끝이 시큰해졌다.

정여울 작가
진정한 기다림은 그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일이다. 누군가를 기다린답시고 인터넷을 검색하며 딴전 피우다 보면 기다림의 ‘제 맛’이 뚝 떨어진다. 나는 이육사의 ‘청포도’야말로 기다림의 아픔이 예술로 승화된 최고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1939년 8월 ‘문장(文章)’에 발표된 이육사의 ‘청포도’는 ‘광야’나 ‘절정’의 강렬하고 묵직한 어조와는 달리 매우 부드럽고 감성적이다.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는 1연을 듣는 순간, 나는 이 시의 상큼한 울림에 매혹됐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있는 청포도라니, 내 마음속에서 청포도의 정의는 그 순간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사랑하는 고향마을의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청포도, 꿈꾸는 듯한 머나먼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힌 청포도라니.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연 많은 청포도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그가 바라는 손님은 과연 얼마나 눈부신 존재이기에, 이토록 소중한 청포도를 아끼고 아꼈다가 대접하는 것일까.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대형마트에서 손쉽게 사계절 청포도를 사먹을 수 있는 우리는 오직 한철, 그것도 귀한 손님이 오셔야만 선물처럼 자랑스레 내놓을 수 있는 이 청포도의 절실한 맛과 향기를 알까. 내 고장의 청포도가 가장 향기롭게 영글어 맺히는 단 며칠을 위해 일 년 내내 기다리는 마음, 청포도를 한사코 은쟁반에 받쳐 ‘하이얀 모시수건’과 함께 대접하는 그 송구스런 마음을 우리는 영영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반드시 그 사람과, 반드시 그 계절에만 먹을 수 있는 그 하나뿐인 순간의 맛을 알기 위해 얼마나 길고 아픈 기다림이 필요할까.

이처럼 삶을 바꾸는 기다림은 그 자체로 적극적인 창조의 몸짓이 돼야 한다.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이 설사 영원히 오지 않을지라도, 어떤 기다림은 그 자체로 위대한 예술의 몸짓이 된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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