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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책과 함께 떠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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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7-01 21:13:02 수정 : 2016-07-01 21: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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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같은 캄차카 풍경
휴대전화 로밍을 꺼놓으니
나와 마주하는 여유 생겨
읽은 기억은 남아있지 않지만
책은 나의 소중한 짐이었다
지난주 러시아에 다녀왔다.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더 북쪽으로 캄차카 반도까지 오르는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 뜨겁고 습한 우리의 여름을 버틸 에너지를 얻자는 것이 처음 여행을 생각하던 이유였다. 한반도의 괴로운 여름은 아래 북태평양에서부터 올라오는 고온다습한 기단 때문이니, 그것을 피해 건조하고 선선한 북방에서 여름을 맞자는 의견이었다.

실제로 러시아의 대기는 청명했고, 수백 킬로 이어진 자작나무 숲은 봄의 잎을 달고 풍요로웠으며, 캄차카 반도의 파란 하늘을 인 눈 덮인 화산과 그 아래 산자락을 유유자적 거니는 불곰들의 풍경은 거짓말처럼 아름다웠다. 화산지대를 융단처럼 뒤덮은 야생화를 보고 있자면, 꼭 다른 외계 행성을 다녀온 기분이다. 이제 한여름을 힘차게 맞는 일만 남았다.

박철화 문학평론가
그런데 여행 짐을 꾸리는 일에 문제가 좀 있었다. 여기는 한여름, 블라디보스토크는 초여름의 선선한 날씨, 2000킬로 북쪽 캄차카의 화산은 아직 눈이 어린애 키만큼이나 쌓여 있는 초봄. 게다가 비라도 내리면, 겨울에 가까운 북방의 날씨 때문에 옷을 챙기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여러 개를 겹쳐 입기로 하고 준비하다보니 생각보다 짐이 늘었다. 거기다 마지막에 남는 고민 하나. 책을 두어 권 따로 챙길 것인가, 아니면 스마트폰 해외 로밍을 할 것인가. 잠시 흔들리다 나는 미련 없이 캐리어와 배낭에 책을 한 권씩 집어넣고는, 로밍을 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내 폰에는 전자책 형태로 1백여 권의 읽을거리가 들어 있다. 게다가 신문과 뉴스를 일용할 양식처럼 끼고 살아온 내가 로밍을 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의 소식과 스스로 단절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여행은 ‘지금 여기’를 떠나, 낯선 길에서 일상의 ‘익숙한 나’를 버리고 ‘다른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러니 거기에서마저 여전히 일상의 끈을 쥐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주 잠시 세상과의 자발적 유폐를 선언하는 비장함을 맛보기도 했다.

로밍을 하지 않으니 첫날부터 불편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내리자, 같이 간 친구들은 스마트폰이 현지 시간과 한국 시간을 함께 보여주는 기능이 있다며 좋아하는 동안 나는 손목시계를 풀어 현지 시간으로 조정하는 일부터 해야 했다. 남의 폰을 힐끔거리는 추접스러운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 세상에 대한 궁금함을 꾹 참으며 바깥 풍경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느 순간 나는 일행들로부터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온전한 나와 마주할 시간을 갖기도 했다.

독방을 선택한 터라 저녁이면 혼자가 됐다. 나머지 두 명의 일행은 일종의 비즈니스 출장을 나선 터라 하루를 정리하며 한국과 부지런히 연락하느라 잠이 모자라 아침이면 하품을 해댔다. 하긴 종일 드넓은 러시아 땅을 누비다 들어오면 씻기 바쁘게 곯아떨어지는데, 그 시간에 소식을 전하느라 쉴 시간을 놓치니 피곤할 만도 했다. 나는 로밍을 하지 않았고, 러시아의 인터넷 통신 사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굳이 피곤한 눈으로 느린 속도를 감수하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이유가 없었다.

로밍 대신 가져간 책은 어떻게 됐을까. 씻은 뒤 침대에 누워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을 펼친 기억은 있는데, 신기하게도 읽은 기억은 없다. 책을 펴드는 순간 잠에 빠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은 단지 쓸 데 없는 짐에 불과했을까. 아니다. 나는 익숙한 일상에 이어진 통신의 끈 대신, 혼자 숨어 있기 좋은 방에서 책을 집어들었고, 그 책이 주는 은밀하며 따듯한 유혹에 힘입어 일상을 떠날 용기를 얻었다. 디지털 디톡스 덕분에 일상의 때를 씻고 낯선 곳의 매혹에 나를 던진 뒤 새로운 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은 나의 소중한 짐이었다.

박철화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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