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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새 미국’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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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8-04 22:43:01 수정 : 2016-08-04 22: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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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쭙잖은 막말 일삼으면서도
유권자 지지 잃지 않는 트럼프
우리 정부·정치권은 늦기 전에
젖 먹던 힘 짜내어 안전망 짜야
뻔한 말도 적절한 맥락에 녹여 쓰면 보석처럼 빛난다.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의 발언이 그랬다. 그는 “20년 전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기업에 투자한 것보다 원숭이가 고른 곳에 투자하는 편이 더 나았다”고 했다. 1일 미국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열린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의 유세에서 트럼프에게 일침을 가한 것이다.

원숭이 투자 실험을 다루지 않는 투자 개론서는 거의 없다. 다트 등으로 종목을 고르는 원숭이의 수익률이 투자전문가보다 낫기 일쑤라는 요절복통 실험들이다. 주식 열풍의 나라 미국에서 잔뼈 굵은 청중이 원숭이 얘기를 모를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버핏은 그 진부한 얘기에 트럼프를 옭아매어 박수갈채를 끌어냈다.

이승현 논설위원
트럼프의 막말 행각은 확실히 과한 감이 짙다. 오죽하면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외교 금기를 깨고 “미국인마저 구역질나게 한다”고 했겠나. 최근엔 무슬림 전사자 가족 비하 발언이 압권이다. 공화당 지도부마저 등을 돌렸다. 원숭이 비유가 먹힌 것은 그래서다. 어안이 벙벙하던 판국에 ‘원숭이보다 못하다’는 일침이 나오니 속이 확 풀릴밖에.

정치를 한다 해서 반드시 말을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 말을 잘해도 반드시 호평만 나오는 것도 아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봉헌식 연설이 좋은 예다. “지금으로부터 여든하고도 칠 년 전에”로 시작된 연설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힘쓰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합니다”로 끝났다. 짧고 굵은 명연설이었다. 링컨에 앞서 2시간 열변을 토한 당대 최고의 연설가 에드워드 에버렛은 “대통령께서 2분 안에 했던 것처럼 제가 2시간 동안 그 봉헌식의 중심 사상에 가까이 다가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혹평도 많았다. 동시대 신문 ‘시카고 타임스’의 헐뜯기 보도가 대표적이다. 신문은 “모든 국민이 부끄러워 볼이 화끈거릴 정도로 어이없고 가소로우며 어쭙잖은 연설이었다”고 전했다. 역사에 남을 명언도 삐딱하게 듣는 이들에겐 막말로 들리는 것이다.

트럼프 발언도 같은 종류일까. 언젠가 재평가를 받게 될까. 아무리 봐도 그럴 것 같지 않다. 그것도 전혀! 그래서 더 착잡하다. ‘시카고 타임스’를 재활용하자면 ‘모든 국민이 부끄러워 볼이 화끈거릴 정도로 어이없고 가소로우며 어쭙잖은’ 언행을 두고도 미국 유권자의 절반 가까이 트럼프를 지지한다. 트럼프가 내세운 ‘미국 우선주의’가 원숭이 비유에 못지않게 잘 먹힌다는 뜻이다. 세계 최강국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대선 경쟁자인 클린턴도 기류 변화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 생리와 한계가 그렇다. 올 11월 대선에서 누가 웃든 지구촌은 과거보다 훨씬 이기적인 ‘새 미국’을 보게 될 공산이 많다.

사활적인 이슈는 ‘새 미국’이 짤 세계 대전략 지도에서 한국이 어디에 놓이느냐는 점이다. 국운이 걸려 있다. 민생과 일자리도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2일 “클린턴은 국무장관 재직 시절이던 2011년 우리 일자리를 죽이는 한국과의 무역협정을 강행 처리했다”고 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클린턴을 엮어 공세를 취한 것이다. 한·미 FTA를 재앙으로 못박기도 했다. 불길하다. 한국이 시범 케이스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이런 경우, 버핏처럼 ‘원숭이보다 못하다’고 쏴붙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통쾌하겠나. 국가 생존과 직결되는 한·미동맹의 가치를 존중해야 하는 우리 정부와 사회는 그럴 경황이 없다. 힘이 있어야 쏴붙이고 말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제정치 역학이 그렇다. 그럴 형편이 안 되면 젖 먹던 힘을 짜내어 안전망이라도 짜야 한다. 멕시코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작금의 상황을 ‘트럼프 비상상황’으로 규정했고, ‘트럼피즘’에 소홀히 대처했다는 이유로 주미 멕시코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박근혜정부에 묻게 된다. ‘새 미국’, 특히 트럼피즘에 얼마나 면밀히 대처하고 있는지를. 친박·비박, 친문·비문 등으로 각각 편을 갈라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정치권에도 묻게 된다. 미국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기는 하는지를.

이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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