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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찬란한 유산, 김정호 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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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13 19:56:02 수정 : 2016-09-13 19:5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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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를 지도에 담은 시대의 선각자
평생 대중들을 위해 헌신과 희생의 삶
추석 연휴 기간 동안에는 차량 행렬이 온 도로를 꽉 메운다. 이때 어김없이 활용되는 것은 내비게이션 지도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은 내비게이션 지도의 길찾기에 모인다. 어느덧 내비게이션 지도는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조선후기에도 지도에 혁명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이전까지 국가나 정부 기관 일부에서 활용되던 지도가 대중화하게 된 것이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1804~1866, 추정)이다. 최근에는 김정호의 생애를 조명한 영화까지 개봉되어 김정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대동여지도’가 김정호의 작품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대부분 ‘대동여지도’를 ‘지도’로 알고 있지, 책자 형태의 지도첩이 모여 완성된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못하다. 실제 ‘대동여지도’는 1책에서부터 22책에 이르는 책자가 모여 그것을 모두 펼치면 우리나라 전도(全圖)가 되는 절첩식(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책자의 형식) 지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축적은 약 16만분의 1로 각 책은 세로 30.2㎝, 가로 20.1㎝ 크기이며, 8폭으로 접을 수 있다. 전체를 펼치면 세로 6.7m, 가로 3.3m의 크기로, 실물을 본 사람은 우선은 그 방대한 크기에 압도된다. 게다가 보급을 위하여 그것을 목판으로까지 새겼으니 김정호는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김정호는 왜 평생을 지도 제작에 매달렸던 것일까? 무엇보다 김정호는 온 국토를 지도에 담으려는 열정을 지닌 지도 마니아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도 제작 배경에는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맞물려 있었다. 상업의 발달로 성장한 상인들에게 전국을 권역별로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했을 것이고, 김정호는 절첩식의 형태로 상인들이 휴대하기에도 편한 지도를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대동여지도’에 각 고을의 거리를 10리마다 표시한 것이나 역이나 원 등 상업과 관련된 정보가 자세한 것도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목판으로 지도를 제작하여 대량 보급을 꾀한 것은 그만큼 이 시기에 지도 수요가 광범위했음을 보여준다.

‘대동여지도’에는 산과 산줄기, 하천, 바다, 섬, 마을을 비롯하여 역참, 창고, 관아, 봉수, 목장, 진보, 읍치, 성지, 온천, 도로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범례에 해당하는 영아(營衙), 읍치(邑治), 성지(城池), 봉수(烽燧), 진보(鎭堡), 창고, 역참(驛站) 등의 지도표를 만들어 훨씬 용이하게 지도를 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대동여지도’의 모본(母本)으로 추정되는 ‘동여도’ 23첩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인 데 비해, ‘동여도’는 채색 필사본으로 목판에는 새길 수 없었던 내용까지도 넣었다. 아마도 필사본 ‘동여도’를 제작하고 대중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에 김정호는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 등 3대 지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평생을 지도와 지리서 제작에만 매달린 한 명의 선각자로 인해 우리는 150여년 전 조선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살펴보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신병주 건국대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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