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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원칼럼] 징비록은 몇 번을 더 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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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19 21:50:11 수정 : 2016-09-19 21:5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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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무장 앞에 벌거벗은 나라
응전할 무기 갖지 않겠다면
유방처럼 금은보화라도 바쳐
부모형제 목숨 구걸해야 하나
‘징비록’을 쓴 서애 유성룡. 자서(自序)에 이렇게 썼다. “임진년의 전화는 참혹했다. 수십일 만에 삼도도 지키지 못하고 팔방은 산산이 무너졌다. 임금은 수레에 올라 파천을 하니….” 삼도는 한양, 개성, 평양을 이르는 말이다. 평양성은 62일 만에 함락됐다. 길마다 널브러진 시신들과 버려진 아이들. 그는 하회 초가집에 앉아 어떤 심정으로 징비록을 써 내려갔을까.

경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이런 글을 남겼다. 종묘 사직의 위패를 모시고 평양성을 빠져나가던 재신 노직. 이속과 백성들은 칼을 빼들고 길을 막아선 채 소리쳤다. “너희들이 평일에 나라의 녹만 도적질해 먹다 이제 나랏일을 그르치고 백성 속이기를 이와 같이 한다는 말이냐.” 유성룡이 경계하고자 한 것은 이 말이 아닐까.


강호원 논설위원
당쟁과 공론(空論)만 일삼은 조선 사대부. 알량한 위패만 싸 달아나니 백성은 파리 목숨으로 변하지 않았던가. 왕도정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임진왜란. 그것도 따지고 보면 도전에 응전하지 못한 역사가 부른 참화다. 징비록의 경계는 그에 가 닿는다.

왜구가 처음 나타난 것은 1223년, 고려 고종 10년 때다. 금주를 노략질했다. 금주는 김해다. 이후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한 뒤 80년 동안 자취를 감췄다. 다시 나타난 것은 1350년 충정왕 20년 때다. 원이 망하기 18년 전이다. 고려도 혼란스러웠다. 이때부터 곳곳에 출몰했다. 예성강에 나타나자 고려는 천도까지 검토했다.

고려의 응전. 1376년 최영은 홍산에서, 1380년 최무선과 나세는 진포에서, 같은 해 이성계는 황산에서 대대적인 소탕전을 벌인다. 응전은 조선에서도 이어진다. 1419년 세종대왕은 군선 227척, 군병 1만7000명을 동원해 대마도 정벌에 나선다. 왜구는 숨을 죽였다. 인의로 따지자면 어느 왕보다 마음 깊이 새겼을 세종. 그도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때의 왜구와 임진왜란 때의 왜적. 세력은 다르지만 본령은 똑같은 존재다.

이후는 달랐다. 붕당의 권력다툼 속에 들끓은 공리공론. 오죽 답답했으면 퇴계 이황은 69세로 한양을 떠나며 선조에게 사화와 북로남왜(北虜南倭)를 경계하라는 말을 남겼을까. 임진왜란 23년 전의 일이다. 응전의 기제가 작동하지 않은 조선. 참화를 맞은 것은 역사적 필연이 아닐까.

지금은 어떨까.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 핵무장에 대해 정치하는 사람들은 한마디씩 한다. “사드를 왜 배치하느냐.” “무기로써 무기를 막는다는 군비경쟁 패러다임 자체에 반대한다.” “독자 핵개발, 전술핵 재배치, 원자력 잠수함 도입에 찬성할 수 없다.” 묻고 싶다. 그러면 어찌 하겠다는 건가. 무엇으로 핵 재앙을 이겨내고, 무엇으로 국민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주장만 있고 대책은 없다.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치고 실질 대책을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념에 얽매인 생각. 노직이 부둥켜안은 위패와 무엇이 다른가.

목숨을 지킬 칼을 갖지 않겠다면 그럭저럭 견딜 방법은 딱 한 가지 있다. 유방처럼 하면 된다. 진 멸망 후 중국을 통일한 한 고조 유방. 기세를 몰아 32만 군병을 이끌고 흉노를 치고자 했다. 하지만 평성 백등산에서 덜컥 포위되고 만다. 이레 동안 굶은 뒤 결국 항복했다. 이후 흉노제국의 선우 모돈(冒頓·묵특)에게 공주와 식량, 금은보화를 갖다 바치며 근근이 흉노의 공격을 면했다. 60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유방이 죽은 뒤 모돈은 황후 여후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제 그대도 홀로 되었으니… 각자 가진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을 메워 봄이 어떠하겠는가.” 여후를 희롱하는 ‘농서(弄書)’다.

우리는 어떨까. 똑같은 짝 나지 않겠는가. 우리의 목숨을 희롱할 곳이 북한뿐이겠는가.

유성룡은 이런 글도 남겼다. “태평한 지 오래되어 나라가 안일에 젖었다. … 이로는 서신을 보내 ‘성을 쌓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정암진이 앞을 막고 있으니 왜적이 어찌 날아서 건너겠는가’라고 했다.” 이어 이렇게 썼다. “만 리 큰 바다도 왜적을 막지 못하는데 좁은 강을 왜적이 건너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이로의 궤변’은 지금도 들끓고 있지 않은가.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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