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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1593년 한양 수복과 1950년 서울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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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28 00:41:20 수정 : 2016-09-28 00: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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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구한 시대적 상황 너무나 비슷
역사는 거울이라는 말 생생한 울림
9월 28일 오늘은 6·25전쟁 시작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긴 대한민국과 유엔의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한 지 정확히 66년이 되는 날이다.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은 남쪽으로 퇴각을 했다. 낙동강 방어선을 겨우 유지하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국군에게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의 참전은 큰 힘이 됐다. 그리고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은 전쟁의 상황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했고, 마침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국군이 38선을 처음 돌파한 10월 1일은 지금도 국군의 날로 기념이 되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도 유사한 상황이 전개됐다. 4월 13일 일본군의 기습적인 침략으로 초토화된 조선군은 5월 1일 한양을 빼앗기고 6월 11일에는 평양성마저 함락당하는 치욕을 당했다. 평양성을 사이에 두고 조선군과 일본군의 대치 상황은 6개월간 지속됐다. 일본군이 의주로 피란을 간 선조를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고 평양성에서 고립이 된 것은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거듭 승전을 하면서 일본군의 병력과 군량의 보급을 확실히 차단했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곽재우 등 의병들이 크게 활약한 것도 일본군의 북진에 타격을 가했다. 1592년 12월 조선의 요청에 의해 이여송 제독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 4만여명이 참전을 했고, 조명연합군은 1593년 1월 평양성 공방전을 대승으로 이끌면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평양성 전투의 승리는 전쟁의 상황을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전투라는 점에서는 6·25전쟁 시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비교되는 부분이 많다. 평양성 전투 이후 일본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기도 했으나, 1593년 2월 권율이 지휘하는 행주산성 전투의 대승으로 마침내 일본에 빼앗겼던 한양을 1년여 만에 수복 하는 전과를 올리게 된다. 행주산성 전투에는 변이중이 만든 화차와 비격진천뢰, 총통(銃筒) 등의 화약무기를 동원해 화력으로 일본군을 압도했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전의를 상실한 일본군은 철수를 서둘렀고, 이보다 앞서 이루어진 명과 일본의 1592년 8월 회담과 1593년 3월 용산회담의 결과 왜적은 한양에서 남해안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울산, 순천, 김해 등지에 왜성을 쌓고 향후의 전쟁을 준비했다.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4월 20일 한양이 수복됐다고 기록하면서, “성중의 유민(流民)들은 백에 한둘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생존자도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 안색이 귀신과 같았으며, 사람과 말이 즐비하게 죽어 썩는 냄새가 성안에 가득했으므로 사람들이 코를 막고 다녀야 했다. 성 안팎에는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공사간의 집들은 하나같이 비어 있었으며 오직 불탄 기왓장들뿐이었다”고 참상을 전하고 있다. 한양 수복 이후 명과 일본의 휴전협상이 3~4년간 전개되는데 이 또한 6·25전쟁의 휴전회담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1593년 4월의 한양 수복과 1950년 9월의 서울 수복에는 서로 연결되는 장면이 많다. ‘역사는 거울’이라는 점이 더욱 생생히 와 닿는 오늘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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