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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국칼럼] 대통령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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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30 01:01:40 수정 : 2016-09-30 01: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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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꼭대기에 올라선 사람은
새소리 물소리 절대 못 들어
‘불통령’의 오명 벗으려면
민심의 숲속으로 내려와야
지인의 친한 분이 최근 금융회사의 사장 자리에 올랐다. 그분은 평소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라 직원들과 소통을 잘할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CEO가 된 그분은 꽉 막힌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기 뜻을 일방적으로 관철하거나 앵무새처럼 자기주장만 되풀이했다. 경청이나 소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직원들 사이에선 “속았다”는 말이 나돌았다.

사실 회사 직원들이 속은 것도, 그분의 행동이 갑자기 변한 것도 아니다. 그분에게 원래 그런 ‘갑질 근성’이 DNA처럼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뿐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우월적 행동을 나타내려는 속성이 존재한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에게 한 방에 궁금증을 풀어줄 실험이 있다.


배연국 수석논설위원
심리학자들이 실험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A그룹의 사람에게는 누구한테 명령한 경험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하고, B그룹에겐 누군가로부터 명령을 받은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고서 이들에게 힘든 과거 경험을 얘기하는 어떤 사람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심장 박동 등을 측정했다. 그 결과 A그룹의 사람들은 B그룹에 비해 영상에 등장한 사람의 어려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심장 박동에도 거의 변화가 없었다. 다른 실험에선 우월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남의 의견을 귀담아듣지 않고 주위에서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은 권력과 반비례한다는 얘기다.

놀랍지 않은가. 실험실에서 단지 권력을 가진 것을 상상했을 뿐인데도 이런 정도라니! 권력감을 느끼면 타인을 배려하려는 노력이 저하되고 안하무인의 성향이 강화된다는 것이 심리학적인 결론이다. 내가 권력을 갖고 있으면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고, 그를 위해 나의 에너지를 투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애덤 갤린스키 교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주위의 압박을 잘 받지 않으며 당당한 태도로 지금의 행동을 고수할 확률이 높다”고 설명한다. 권력은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인 동시에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권력자가 자주 불통의 늪에 빠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갑질 근성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우리가 평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선량해서라기보다는 권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갑질은 힘이 약할 땐 흐릿하지만 권력이나 지위를 가지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런 징후를 일상에서 심심찮게 목도한다. 일개 친목단체에서도 완장을 차면 다른 회원들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작은 조직이 이 정도라면 국가의 정점에 있는 최고 권력자는 어떨까.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지닌 데다 고급 정보를 폭넓게 접한다. 산 정상에서 아래쪽을 내려 보듯 국정을 훤히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귀에 들어올 턱이 없다.

하지만 산 위에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산의 진짜 풍경은 정상이 아니라 산속에 있다. 정상에 오른 사람이 보는 것은 산의 전체 모습이나 숲일 뿐이다. 숲속을 뛰어다니는 다람쥐나 예쁜 야생화는 결코 볼 수 없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산새 소리는 언감생심이다.

마찬가지로 권력의 꼭대기에선 민심을 체감하기 어렵다. “지당하옵니다”만 연발하는 구중궁궐 청와대라면 국민의 소리는 왜곡되게 마련이다. 집권자가 생생한 민심을 느끼고 싶다면 스스로 몸을 낮춰 숲속으로 내려오는 수밖에 없다.

박근혜정부가 출범 3년 반 만에 불통의 늪에 빠진 것은 국가적 불행이다. 병약한 조선이 500년 사직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민심의 소리를 들으려는 지난한 노력 덕분이다. 당시 왕에게는 직언만 전담하는 간관이 있었다. 왕은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평복을 입은 채 수시로 잠행했다. 박 대통령은 조선에서 500년 소통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평복을 입고 민심의 숲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불통(不通)령’의 오명을 벗고 진정한 ‘대통(大通)령’이 되는 길이다.

배연국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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