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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미의 엄마도 처음이야] <27> 엄마도 게임중독이었단다

관련이슈 이현미의 엄마도 처음이야 , 디지털기획

입력 : 2016-10-08 17:16:13 수정 : 2016-10-08 17: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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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중독이었던 엄마, 자녀의 게임에 뭐라 말해야 할까
나는 인생의 한 때를 게임에 푹 빠져 지냈다. 초등학교 시절 팩 게임에 열중했던 건 애교 수준이었다. N사의 리니지2를 시작으로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에 빠져들었다. 청년실업에 동참하던 시절에는 ‘아이온’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나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최근에는 아이를 재우고 난 뒤 프로게이머들이 펼치는 ‘블레이드 앤 소울’(블소) 토너먼트 영상을 볼 때가 있다. 나는 윤정호(기공사) 선수의 팬이다.

블레이드앤소울 토너먼트에 참여한 프로게이머 윤정호와 권혁우의 대결 모습. OGN 캡처
블소 토너먼트는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을 연상케 한다. 에반게리온 주인공들은 거대 생체로봇인 에반게리온과 ‘싱크로’(신경연결)를 통해 일체화한다. 주인공이 팔을 뻗으면 한치의 오차 없이 에반게리온이 같은 동작을 펼친다.

프로게이머들의 플레이도 이와 같다. 상대의 공격에 대한 적합한 방어 기술을 머리로 판단한 뒤 조작 버튼을 누르는 시간은 0.1초도 걸리지 않는 것 같다. 프로게이머들의 대결은 인간의 반사신경과 판단능력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엄마가 되면서 ‘아이가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 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 우리 아들도 게임에 미친듯이 열중하며 부모를 염려케할 시기를 겪을 것이다. “도대체 컴퓨터 게임을 왜 하니? 뭐가 재미있니? 인생을 그렇게 허비할래?”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내게도 양심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게임에 대해선 나는 뭐라 할 자격이 없는 엄마다.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게임을 하게 된 건 인문학의 영향이 컸다. 내가 대학 생활을 했던 2000년대 초중반, 인문학의 주요 화두 중 하나는 가상 세계였다. 영화 ‘매트릭스’가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실제로 만지거나 냄새 맡을 수 없는 가상 세계는 말 그대로 허구일까, 그 세계에서 느낀 감정은 진짜일까 착각일까. 2004년 리니지2에서 일어난 ‘바츠 해방 혁명’은 이런 물음을 증폭시켰다.

2004년 리니지2에서 벌어진 바츠해방전쟁에 참여한 내복단들. 인터넷 블로그 캡처
바츠 혁명은 리니지2의 첫번째 서버인 바츠를 장악했던 거대 혈맹(팀의 구성단위)과 게임 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용자들이 벌인 전쟁이었다. 성을 장악한 집권 세력은 주요 사냥터를 독식하고 세율을 높이는 등 일반 이용자를 착취하며 원성을 샀다. 이 횡포에 분개한 이용자들은 혁명군을 결성했다. 바츠 서버의 이용자뿐 아니라 타서버와 그때까지 리니지2를 하지 않았던 일반인까지 합세했다. 규모는 20만명에 달했다. 이제 막 캐릭터를 만든 사람들은 내복(아이템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 상태로 대의를 위해 나섰다.

게임을 그만두거나 다른 서버로 옮기면 그만일 텐데 수많은 사람들이 게임 내 집권 세력과 맞서 싸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정의감은 그만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 감정은 에너지 낭비일까 소중한 경험인 걸까.

이런 스토리에 매력을 느끼며 나는 MMORPG(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다중사용자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를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게임을 해보니 레벨을 높이고 아이템을 바꿀 때 느끼는 성취감이 게임을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 됐다. ‘조금만 더 하면 만렙(최고 레벨)을 찍을 수 있는데, 좀 더 하면 아이템을 바꿀 수 있는데’라는 생각은 중독의 세계로 이끌었다. ‘혁명은 무슨….’ 몸에 안 좋은 걸 알면서 피우는 담배처럼 게임이 머릿속에 달라붙었다.

이 고리가 끊긴 건 직장인이 되면서였다. 직장 생활을 내팽개치고 게임에 열중할 만큼 세상살이를 모르는 나이가 아니었다. 출산 이후로는 단 한번도 접속한 적이 없었다. 5살 미만 영유아를 돌보는 엄마에게 PC게임을 할 시간은 절대 주어지지 않는다.

아이온 게임의 한 장면. 인터넷 블로그 캡처
그리고 어느 날, 아이온 OST를 들으면서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노래 하나하나에 캐릭터가 된 내가 보았던 게임 속 아름다운 배경과 동식물, 당시 느꼈던 감정이 주르륵 펼쳐지는 게 아닌가. 이 세상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지만 그 풍경들은 분명 내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었다. 10년 전 겨울, 나는 경기도 포천에 있는 명성산 억새풀밭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 적 있었다. 눈이 소복이 내린 억새풀밭은 환상의 세계 그 자체였다. 아이온의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억새풀밭이나 게임 속 세상이나 지금 내게 이미지만 남았다는 점에서 동일선상에 있다. 가상 세계는 의미 없는 허구가 아니라 경험의 확장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런 생각에 부모의 입장이 더해지면 게임에 대한 생각이 복잡해진다.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내용으로 입장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감정의 충만함을 느끼는 것처럼 게임도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문화 콘텐츠인 것은 맞다. 문제는 다른 여가 활동에 비해 몰입도가 어마어마하게 높다는 점이다. 1∼2시간은 눈 깜박할 사이고 이틀 밤도 굳건히 지새우게 할 만큼 중독성이 강하다. “게임에 대한 ‘중독 담론’은 생산과 관계 없는 것을 죄악시했던 산업화 시대의 구태”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에 대한 부모의 염려는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아이가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게임에 빠져 지낸다면 이러한 모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인생의 큰 방향은 10, 20대에 결정된다. 삶의 다양한 기회는 청춘의 전유물이다. 40, 50대에 새롭게 도전하는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다. 장년은 그간 이뤄놓은 걸 토대로 나아가는 시기다. 20, 30대에 사회의 한정된 자원을 놓고 벌이는 경쟁에서 이탈하거나 뒤처진 사람이 나이들어 자신의 상황을 바꾸기란 어려운 법이다.

이 때문에 부모들은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학령기 자녀가 미래의 먹고 사는 문제에 보탬이 되는 활동을 하기를 바란다. 우리 부모님이 그랬고 나 역시 아이에게 이런 마음을 갖게 될 것 같다. 하지만 “도대체 게임을 왜 하니?”라는 말은 양심이 찔려서 도저히 할 수가 없다.

내가 내린 결론은 ‘게임만 재미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자’다. 게임은 재미있는 활동이지만 그 외에도 흥미롭거나 중요하게 느껴지는 일들은 많다. 그 가치를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어렸을 때부터 아이에게 다양한 관심을 불어넣어주고 싶다. 내가 게임에 집중하면서도 이로 인해 다른 걸 팽개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남편(당시 남자친구)이 나를 한심하게 볼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구직 활동의 중요성을 깊이 새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대가 아닌 20대였기에 좀 더 자제심을 가질 수 있었던 측면도 있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이는 어떤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될까. 부모가 아무리 아등바등 노력해도 아이들은 제 몫을 가지고 스스로 겅장한다. 하지만 부모가 문화적 취향을 공유하며 인사이트를 불어넣어줄 수는 있다. “게임의 재미는 레벨 업만이 아니야. 그 배경에는 북유럽 신화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원형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단다.” 이를 위해선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소통해야 한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유혹에 흔들리더라도 타협점을 찾을 수 있는 법이다.

“엄마도 어글 안 먹고(사냥 대상을 도발하는 행위를 뜻하는 ‘어그로’ 안 하고) 몹(게임 속 캐릭터) 사냥 잘해∼.” 언젠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아이의 성향에, 훈육 책임이 있는 부모의 역할에 달렸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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