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산부터 100일까지 조금만 짬이 생기면 꾸벅꾸벅 졸 정도로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다. 이 때의 아이는 엄마에게 모든 걸 의지하는 연약한 생명이었다. ‘우리 애가 언제쯤 밤에 통잠을 잘까.’ 100일까지 디데이를 셌는데 만성 피로에서 벗어나는 날은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그랬던 아이가 이제는 한번에 10시간 이상을 자고 깔깔거리며 뛰어다닐 정도로 부쩍 자랐다. 시간은 거북이 걸음인 것 같으면서도 화살처럼 날아간다.
아이가 뒤집기를 하던 때의 모습. 불과 지난해인데 이 시기가 언제였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
최근에는 꼬꼬마 동생이 언제 이렇게 컸나 싶으면서 후회가 밀려온다. 내가 동생에게 자주 했던 말은 “누나 바빠. 누나 시간 없어”였다. 동생은 나이가 많은 부모님보다 누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밤마다 내 방문 앞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나 누나방에 있으면 안 돼?” “누나 바빠. 나중에 들어와.” 나는 매번 거절했고 동생은 내가 없을 때만 누나방에서 혼자 놀면서 형제의 존재를 느낄 뿐이었다.
지금 같으면 하루 일과를 묻고 함께 영화도 볼 텐데 당시 나는 대화 수준이 맞지 않는 동생의 요구가 귀찮게 느껴졌다. 학점, 아르바이트, 취업에 짓눌려 바쁜 척 했다.
동생에게 베푼 건 가끔씩 손에 쥐어주는 용돈 정도였다. 동생은 친구들과 놀다가 동네 어딘가에서 나를 발견하면 “누나∼∼∼∼∼” 기쁜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내 허벅지에 가슴을 부딪치며 씩 웃었다. “나 500원만.” 1000원도 아니고 항상 500원이었다. 이것만큼은 흔쾌히 들어줬다. 동생은 500원을 들고 다시 친구들 무리에 섞였다.
뒤집기조차 끙끙거리며 했던 아이가 이제는 깔깔거리며 신나게 뛰어다닌다. |
나의 꼬맹이였던 동생이 다음 달 군입대를 한다. 이제는 “누나랑 같이 가주면 안 돼?”, “같이 놀러가자” 등 내가 동생의 시간을 요구할 뿐 이 애는 누나와의 시간을 바라지 않는다. ‘애들 크는 건 한 순간이구나, 형제든 자식이든 다 자라면 제 길 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뿐이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련해진다. 매일 저녁 내 방에 들어오고 싶어하고 나를 따라하고 싶어했던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없다. 형제끼리 진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시기도 지났다. 앞으로 우리는 간간히 우정을 나눌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 세대 많은 남성들이 “젊은 날 왜 그렇게 바깥으로 돌면서 애들 크는 걸 보지 못했는지 후회가 된다”고 하는 심정을 나는 가슴 깊이 공감한다. 동생이 군 생활을 하며 외부와의 연결 고리를 갈구할 때 편지, 면회, 선물 등을 동원하며 이제라도 동생의 요구에 충실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부모에게 꼭 붙어있고 싶어하는 시기도 한 때인 것 같다. 이 시간을 즐겨야 겠다. 게티이미지 제공. |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부모와의 스킨십을 거부하고 중학교 때부터는 함께 나들이 다니기도 쉽지 않다고 인생 선배들은 조언했다. 매일 밤 잠든 아이의 볼을 만지고 손으로 허리를 휘감으면서 ‘이것도 지금이니까 마음껏 할 수 있는 거네’라며 이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기를 희망한다. 그런 마음이 힘든 시간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