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전 피화당에 온 듯 피안의 시간 나는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소리내어 읽기’를 하고 있다. 시간이 없을 때는 단 몇 줄이라도, 책에서 좋은 문장을 골라 소리 내어 읽곤 한다. 사실 처음에는 ‘졸음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벼락치기로 시험공부를 하는데, 새벽이 되자 너무 졸려서 교과서를 천천히 낭독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지고, 공부를 조금 더 하고 싶다는 의욕이 샘솟았다. 그때부터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많이 힘들 때마다, 잡념을 몰아내고 싶을 때마다 소리내어 읽기를 한다. 많은 사람에게 낭독해주지 않아도 좋다.
그냥 내가 내 자신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러면 ‘머나먼 풍경’처럼 느껴지던 문학 작품 속의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처럼, 바로 지금 겪고 있는 내 인생의 문제인 것처럼 느껴진다. 소리내어 읽기는 아주 쉬운 것이지만 너무도 놀랍게,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줄 수가 있다. 타인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내 삶을 바라볼 수도 있다. 소리내어 글을 읽는 시간은 ‘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시간, 내 마음 깊은 곳의 숨겨진 나만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다.
정여울 작가 |
나에게는 소리내어 읽기가 바로 피화당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시끄러운 곳이라도 오직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낭독을 시작하면, 그곳이 곧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피화당이 된다. 내게 낭독의 시간은 좋아하는 작품을 혼자 소리내어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내 목소리, 내 마음의 무늬를 알게 되는 시간’, 내가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도시 속에서 미디어와 함께 살아가다보면 ‘나’를 자꾸만 ‘타인의 시선’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내가 미디어나 타인의 시선에 길들지 않은 상태로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이 더 어려워질 때. 소리내어 글을 읽으면, 내가 나로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삐걱삐걱 덜컹덜컹거리면서도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느낌, 내 마음의 아픈 그림자를 만지는 느낌이 드는 시간. 소리내어 책을 읽는 시간, 내가 나의 피화당이 되는 시간이다.
정여울 작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