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모는 고언 대신 불충 걱정
청와대 밖 얘기는 들으면
안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세계일보가 2014년 11월 ‘정윤회 문건’을 보도하면서 시작된 ‘비선실세의 국정개입 의혹’ 파문은 또 다른 비선실세 최순실의 등장을 암시하는 예고편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정윤회 보고서를 “찌라시에나 나오는 이야기들”이라고 무시하고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줄거리는 복잡해도 얼개와 결말은 뻔한 밀실권력 고발극 ‘최순실 게이트’는 불발에 그쳤을지 모른다. 검찰 수사가 ‘청와대 문건 내용은 모두 허위’라는 결론을 내렸어도 청와대는 비선인사 국정농단 소문과 비선 간 권력암투설의 뿌리를 파헤쳤어야 했다. 애써 외면하다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한꺼번에 터져 냄새가 진동했고, 마침내 세상 사람들이 두 눈으로 보게 된 것이 최순실 의혹이다.
박 대통령은 경제 대도약을 위해 문화체육 투자 확대를 기업인들에게 부탁한 것이 전부라고 했다. 대기업들 팔을 비틀어 800억원을 모금하고,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의 설립 허가증이 하루 만에 나오고, 최씨 모녀가 이화여대와 국내외를 휘젓고 다닌 것은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대통령 부탁을 받은 전경련과 기업인들이 뜻을 모아 알아서 뛰었든, 이 모든 일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든 대통령이 남 말 하듯 하고 넘어갈 계제는 아니다.
김기홍 논설실장 |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고친다는 얘기까지 나오자 청와대는 “말이 되는 소리냐”고 펄쩍 뛰었다.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얘기이지만 최씨가 지금까지 하고 다닌 일을 보면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는 것 말고 그보다 더한 일도 하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의혹이 눈덩이처럼 구르다 보면 사실이 되고 소문은 진실로 둔갑한다.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 가운데는 사실무근이거나 부풀려진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된다.
호미로 막을 것을 굴착기로도 막지 못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은 남의 탓이 아니다. 대통령은 “내가 아니라고 하면 끝”이라 하고 참모들은 고언 대신 불충(不忠)을 걱정한다. 삼척동자도 아는 최씨를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은 “모른다”고 했고, 온 세상이 아는 박 대통령과 최씨의 40년 절친 관계를 이원종 비서실장과 박 대통령의 최측근 이재만 총무비서관은 “박 대통령과 아는 사이지만 절친한 건 아니다”라고 했다. 최씨가 박 대통령 뒤에서 호가호위했다는 풍문이 떠도는데도 청와대가 “전혀 알지 못하고 논의해 본 적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말이 되는 소리는 아니다.
박 대통령은 두 재단 의혹을 해명하면서 “어떠한 사심도 없다”고 했다. 사심이 없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젠 그런 말도 부담스럽게 들린다. ‘사심이 없다’는 말을 뒤집으면 자신의 결정은 항상 옳고 외부의 비판엔 귀 기울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박 대통령은 어제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온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左순실 右병우’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개헌 문제를 불쑥 꺼냈다. 청와대 사람들은 청와대 밖 어떤 말도 들으면 안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청와대 담장 밖 세상과 맞서 싸우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다.
김기홍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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