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내다보는 아이를 캣타워에 올라 있는 고양이가 내려다보고 있다. 고양이와 아이는 아직 내외하는 중이다. |
“애한테 건강상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가족인데 어떻게 버리냐. 못 헤어진다.” 주변의 질책에 나는 완강히 저항했다. 대소변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를 둘 줄 아는 고양이는 털 문제만 없다면 함께 살기에 결점이 없는 동물이다. 이제는 아이가 제법 자라서 털 문제로 덜 고생하지만, 돌 전까지 나는 털 치우는 노예로 살았다. 눈을 뜨자마자 청소기를 돌렸고 다시 침구 청소기로 아기가 생활하는 곳을 집중 청소했다.
고양이들과 함께 지냈던 첫 집에서 냥이들이 부엌 창틀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 |
하지만 아이보다 내가 더 설레면서 구입한 아이 전용 쇼파마저 초토화됐을 때 “아이고, 아이고”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이는 개구진 표정으로 쇼파의 상처에서 솜털을 쏙쏙 뽑아냈다. “이것도 고양이들이 뜯겠지?” 나는 아이 용품을 구입하기 전 냥이들의 행동패턴을 고려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불편을 감수하면서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이유가 뭘까. 가끔씩 곰곰이 생각해본다. 가족이 됐다는 책임감, 작은 생명이 주는 위로, 지난 시간 쌓은 유대감 등이 복합적으로 떠올랐다.
비오는 어느 날, 냥이들과 창밖을 내다보면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비 온다. 저게 비야”라며 아이를 베란다로 데려갔다. 거리는 물기에 축축히 젖어있었다. 색색의 우산들이 행인의 발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고양이들도 나를 쫓아 베란다 창가에 섰다. 커다란 눈망울로 조용히 빗물을 바라본다. ‘쟤네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동물에게 비오는 날의 풍경은 어떤 인상일지 궁금해졌다. 고양이는 조금이라도 물이 튀면 바르르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는 동물이다.
아이의 생후 100일부터 아가방에 출입할 수 있게 된 첫째 고양이가 조심스럽게 아이 옆으로 이동하더니 철퍼덕 누워버렸다. 이때만 해도 키가 비슷했지만 지금은 아이가 훨씬 큰 형아다. |
아이와 고양이는 현재 내외하는 관계다. 힘 조절을 못하는 아이에게 잡히면 뜯기고 꼬집히는 탓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줄행랑을 친다. 잘됐다 싶었다. 궁지에 몰린 고양이가 본능적으로 발톱을 세울까봐 걱정하던 차였다. 한 집에서 바라만 보는 관계로 지내며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첫째 고양이를 구조한 분이 찍은 녀석의 길냥이 시절 모습. (왼쪽 사진) 이제는 먹고 자고 노는 상팔자가 됐다. |
‘인간보다 생애 주기가 짧은 동물과의 동거는 삶을 더욱 성찰하게 해준다’는 말을 나는 깊이 공감한다. 가족이어서, 사랑하는 생명이어서 고양이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아이가 있는데 왜 고양이를 키우냐?”며 질책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깨달음을 전하고 싶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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