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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나누며] “난민들 나 같은 고통 안 겪게 난민법 확대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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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1-04 20:46:08 수정 : 2016-11-18 14: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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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태 난민권리네트워크 의장 욤비 토나 광주대 교수 “제가 난민입니다. 그래서 난민들의 처지를 가장 잘 알죠. 난민들이 어느 나라에서나 차별받지 않고 권리를 보장받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저의 역할입니다.”

욤비 토나(50) 광주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는 지난 9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난민권리네크워크(이하 난민권리네트워크) 총회에서 의장에 선출됐다. 임기는 2년이다.

난민권리네트워크는 난민권리 옹호를 위해 2008년 창설된 비정부기구 연합단체로, 한국을 포함해 28개국 304개 난민단체와 개인이 참여하고 있다.

욤비 토나 광주대 교수는 난민들의 인권과 권리 보장을 위해서는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난민법을 반드시 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대 제공
“난민 출신이 처음으로 의장에 선출된 겁니다. 누구보다 난민의 어려운 상황을 잘 알 것으로 보고 저를 선택한 것이죠.”

토나 교수는 요즘 어깨가 어느 때보다 무겁다. 의장 선거에 14명의 후보가 출마했지만 회원들은 토나 교수에게 99%의 몰표를 줬기 때문이다. 이런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데는 토나 교수가 난민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4일 연구실에서 만난 토나 교수는 유엔난민기구에 이메일을 보내고 있었다. 미얀마를 탈출해 태국 난민캠프에 머물던 34명이 때마침 한국으로 들어온 날이다. 토나 교수는 이들이 한국에서 정착하는 데 국제기구가 어떤 도움을 줘야 하는지 등을 협의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토나 교수는 난민들의 지위와 권리 보장을 위해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7월 보름간 각국 정상이 모인 유엔난민기구에서 난민의 실태와 현실을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한 달에 2∼3차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국가를 돌면서 각종 세미나와 강연을 하고 있다.

토나 교수는 고국인 콩고민주공화국 내 부족국가인 키토나 왕국의 왕자였다. 그는 왕의 자리를 승계하는 1순위로 어린시절에는 윤택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왕자의 자리를 포기했다. 왕족시스템의 나라에서는 모든 국민이 잘살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콩고민주공화국은 땅과 자원을 가치로 환산하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사는 나라인데, 독재가 장기화하면서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하게 살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때문에 그는 왕족시스템을 바꾸고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대학졸업 후 콩고비밀정보국에서 근무했다. 동료들과 함께 콩고민주공화국의 독재정권을 물러나게 하는 정보를 생산해 공유했다. 독재정권의 미운 털이 박혔다. 결국 그와 동료 등 7명은 내란혐의로 3개월 복역을 했다.

토나 교수는 동료들과 함께 교도소에서 탈출했다. 탈출한 동료 4명은 곧바로 유럽으로 망명했지만 그는 친척집에 며칠간 머물다가 기회를 놓쳤다. 독재정권의 체포가 임박하자 그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2002년 2월, 그의 국제 난민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에서 에티오피아 대사관을 찾아 망명을 시도했지만 그게 화근이 될 줄은 몰랐어요. 콩고민주공화국 대사관에서 알게 된 것이죠. 본국으로 송환될 위기에 놓였어요.”

중국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그는 두 번째 망명국가를 골라야 했다. 우연히 ‘KOREA 대사관’을 보고 무작정 망명을 신청했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평양이 아니었다. 토나 교수는 “코리아 하면 북한이 먼저 떠올라 비행기가 평양에 가는 줄 알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서울에 도착한 후에야 그는 자신이 한국에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국에서 망명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인천에 터를 잡고 한국정부에 난민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난민법이 제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난민신청은 번번이 거절됐다. 한국에서의 이방인으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은 고통의 나날이었다.

“한국에서 생활은 차별의 연속이었어요. 피부색깔이 다르다고 일자리를 주지 않았어요. 일자리를 얻어도 임금을 제때 받지 못했어요.” 그는 돈이 필요해 막노동을 했지만 임금을 온전히 주는 사장은 한 명도 없었다고 털어놨다. 또 흑인에 대한 놀림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2008년 2월22일, 토나 교수가 평생 잊지 못하는 날이다. 그는 이날 한국 망명 6년 만에 난민지위를 인정받았다. 도망자의 삶에서 난민이라는 당당한 신분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그해 8월 그의 가족들도 한국에 왔다.

우리나라는 2014년 6월부터 난민법을 시행하고 있다. 이 법은 난민의 지위와 처우 등에 관한 사항을 담고 있다. 아시아에서 난민법이 제정된 국가는 우리나라와 일본, 필리핀, 캄보디아, 네팔, 말레이시아 6개국뿐이다. 이들 외의 나라에서 난민들은 보호를 받지 못하고 불법체류자로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전 세계 각국에서 내전 등으로 난민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가장 큰 목표는 더 많은 나라에서 난민법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민들에 대한 관심과 보호를 위한 법률과 노력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게 토나 교수의 설명이다.

2013년 광주대 김혁종 총장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그가 꿈꿔 왔던 교수가 된 것이다. 토나 교수는 대학에서 인권과 난민, 다문화, NGO, 아프리카의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에서 난민이라는 신분은 많은 가르침을 줬다. 난민들이 더 이상 나 같은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된다” 토나 교수가 학생들에게 수업 전 칠판에 적어 놓은 자신의 좌우명이다.

광주=한현묵 기자 hansh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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