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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문화재] 부활한 능묘비, 소령원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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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1-09 21:08:57 수정 : 2016-11-09 21: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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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년 음력 1월 25일, 세조는 현릉(문종 능)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울지를 두고 신료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문종의 국상을 치른 지 4년이 지났지만 그의 맏아들 단종의 자리를 빼앗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현릉 신도비 건립은 분명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세조는 신도비 건립을 불허했다.

신도비는 고려시대부터 유행한 비석의 형태로, 왕릉이나 종2품 이상 고관의 무덤 근처에 세워 고인의 생애와 업적 등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15세기까지 건원릉을 비롯해 선왕의 능에 신도비를 줄곧 세웠음에도 세조에 의해 전통이 단절된 후 왕족의 무덤에 신도비를 세우는 일은 거의 금기시되다시피 했다.

약 250년 가까이 지킨 신도비 건립 불문율을 깨트린 이는 영조였다. 그는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725년 3월 모친 숙빈최씨 묘소인 소령원(昭寧園)의 초입에 5m에 가까운 거대한 신도비를 세웠다(사진). 석재를 운반하기 위해 1만명 이상 동원되었고 농사철이라 백성들의 피해가 예상된다는 우려에도 영조는 작업을 강행했다. 국정 운영에서 백성들의 입장을 가장 먼저 생각했던 영조에게 무수리 출신 모친의 위상을 높여 왕권의 명분을 찾는 것이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다.

소령원 신도비는 왕릉 신도비와 표석형태를 혼합해서 만든 독특한 예이자 역동적인 조각기법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신도비는 거북 모양의 귀대석 위에 비석 몸체를 세우고 그 위에 쌍룡이 엉킨 타원형의 이수(?首)를 얹는 것이 일반적인데, 소령원 신도비는 한옥의 처마를 본뜬 비석머리에 용의 몸통이 어우러진 가첨석(加?石)을 얹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소령원 신도비의 진정한 멋은 여의주를 물고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거북의 당당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개인적, 정치적 역경에서도 영조가 화려하게 부활시킨 전통의 상징이자 통치철학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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