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독립운동 양우조·최선화 집 터 기계소리만 요란

관련이슈 류영현기자의 역사항쟁지 다시보기

입력 : 2016-11-10 20:21:49 수정 : 2016-11-21 17:00:5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양우조·최선화 부부는 8년간 육아일기를 썼다. 1938년 중국 창사에서 딸 제시가 태어난 순간부터 광복 후 귀국하던 1946년 4월29일까지 쓴 육아일기는 ‘제시의 일기’란 책이다.

양우조(1897∼1964)는 평남 강서에서 태어났다. 중국에서 활동할 때 양소벽, 양묵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19세가 되던 1915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양우조는 1916년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초·중학교를 마치고, MIT를 거쳐 1927년 매사추세츠주 폴리버에 있는 브래드퍼드 듀피방직학교를 졸업했다. 미국에서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한 그는 서른한 살에 귀국, 조국 땅에서 방직공장을 세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러 왔다는 의심과 함께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됐다.

충칭시 치장구 신제쯔 싼타이좡 30호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홍진·조소앙·양우조 가족(아래사진) 등이 1년간 거주했던 곳이다. 지금은 원형이 모두 사라지고 공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자신의 꿈을 실행하기가 어려워지자 다시 상하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 중심의 민족진영 인사들과 함께 한국독립당 결성을 추진했다. 이후 임시의정원 상임위원과 생계부 차장으로 선임됐다. 1943년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표대회 이후 중앙상무위원 겸 재무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해 1947년 인천 제마방직회사와 조선방직협회의 이사로 활동했다.

부인 최선화는 인천에서 태어났다. 1931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6년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흥사단에 가입한 그는 광저우에서 흥사단 창립기념식을 갖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했고, 나중에는 한국애국부인회의 서무부장에 선출됐다.

이들 부부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떠나 1940년 10월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8년간 중국을 떠돌아다녔다. 치장에는 1939년 5월에 도착하여 약 1년간 머물렀다. 당시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은 모두 107명이며, 모두 4곳에 분산되어 거주했다. 이들이 거주하던 곳은 린장가 43호, 상성가 30호, 관인안, 신제쯔 싼타이좡 30호였다. 이들 부부는 조소앙 선생의 가족 등 17명과 함께 삼태장 30호에 거주했다. 지금은 원형이 완전히 훼손되었고,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류영현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
  • 오마이걸 유아 '완벽한 미모'
  • 이다희 '깜찍한 볼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