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에 오르는 연기는 아련하지만, 추수가 끝난 후 병충해를 박멸하고 거름을 만들 다목적으로 피우던 들불은 뜨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까만 어둠이 내릴 때 지평선에 일렬로 빨갛게 타오르던 불빛은 높은 지대의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의 온갖 풍파를 일거에 제압해버릴 성난 아우성처럼 다가왔다. 들불에 대적할 것은 적어도 이 세상에선 없어 보였다. 지난 시절 압제에 맞서는 양상에 대해 자주 표현하곤 했던 ‘들불처럼 타오르는’ 같은 수식을 관념이 아닌 실제 풍경으로 어린 시절 그 들녘에서 체험했다.
횡대로 늘어서서 지평선을 달려오는 들불 앞쪽으로 어둠 속에서 춤을 추듯 허공을 날아다니는 불도 보았다. 출타한 어른을 기다리며 밤중에 언덕에서 목이 빠져라 신작로 쪽을 바라보던 남매는 그 불이 순식간에 들판을 건너와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에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우리는 그 불을 말로만 듣던 도깨비불이라고 믿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당시 시골에서 흔치 않았던 자동차의 불빛이었거나, 그도 아니면 누군가 들고 달려오던 횃불이 아니었을까 싶다.
횃불은 오랜 세월 어둠을 밝히는 상징적인 조명 도구였다. 제사나 축제 때 신성한 불을 옮기는 의미로도 각광받았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 아래에서는 음습하고 부패한 것들이 오래 견딜 수 없다. 민낯이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 뜨거운 열기를 감당하기 힘들다. 횃불은 신성한 불이지만 분노의 화염이기도 하다. 들불처럼 진군하는 대열 앞에 횃불까지 높이 오르면 제아무리 검질긴 어둠도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촛불만으로 가소롭다면 노도처럼 밀려오는 저 들불은 어떠한가. 그 전열 앞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은 도깨비불이 아니다. 저 성난,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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