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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안무 장군 국민회군 주둔지 수풀만 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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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1-24 21:11:05 수정 : 2016-11-24 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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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독립운동 사상 첫 대규모 승리인 봉오동전투와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청산리대첩. 청사에 빛나는 두 전투의 승리 뒤에는 국민회군 사령관 안무 선생이 있었다. 안 선생은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아 은둔의 독립군 대장으로 불렸다.

1883년 함북 경성에서 태어난 안 선생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대한제국 육군 진위대에 입대했다. 한성교련관양성소를 졸업하고 진위대 교련관이 됐다.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군복을 벗고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투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듬해 경술국치로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자 중국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에서 대한국민회 소속 국민회군을 조직해 사령관에 취임했고, 구춘선 등과 함께 중국 측의 협조를 받아 독립군 양성에 나섰다.

옛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워 생도 양성과 전투력 배양에 힘썼다. 안 선생은 1920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등과 함께 연합사령부를 조직한 사령관 최진동의 부관이 되었다. 그해 6월 봉오동전투에서는 일본군 150여명을 몰살시키는 대승리를 거뒀다. 독립군에게는 최초의 대규모 승리였던 셈이다. 이를 기회로 안 선생은 1920년 10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와 함께 만주 허룽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2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린성 옌지시 이란진 춘싱촌에 있는 안무 선생(작은 사진)이 이끌던 대한국민회의 직할 독립군 부대 국민회군의 주둔지.
독립기념관 제공
청산리 전투 후 독립군 부대들은 사실상 해체된 채 일본군 토벌작전을 피해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대로 옮겨갔다.

김좌진 장군은 흑룡강 넘어 융안현으로 옮겼고, 안 선생은 홍범도 장군과 함께 러시아로 건너갔다. 1920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해 무고한 우리 민족을 대량으로 학살한 경신참변 후 독립군을 이끌고 밀산을 거쳐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 이주한 안 선생은 독립군을 재편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른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1924년 만주 간도에 잠입했다. 그러나 안 선생은 룽징시 마오얼산 부근에서 일본군에게 발각돼 기습 총격을 받고 큰 부상을 입었다. 인근 자혜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치료를 거부하다 이틀 만에 숨을 거뒀다. 마흔 한살의 불꽃같은 삶이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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