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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박열 ‘20년 옥중투쟁’ 한 서린 지바교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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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02 01:07:36 수정 : 2016-12-02 01: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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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 ‘동주’ ‘암살’ 등 최근 몇 년간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잇따르고 있다. 선열들의 숨겨진 독립운동사를 발굴해 널리 알린다는 점에서 크게 반길 일이다.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가 내년에도 선보일 예정이다. 내년 1월 촬영에 들어가는 이준익 감독의 ‘박열’은 실존인물로서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 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가를 그린다.

박열(1902~1974)은 지금의 경북 문경시 모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때 집에서 40리나 떨어진 함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소학교에서 한 선생님의 영향으로 반일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상경해 경성고보 사범과(경기고 전신)에 입학했다. 박열은 재학 중 3·1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지하신문을 발행했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0월 자퇴하고 일본으로 떠나 도쿄의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수학했다. 


아나키스트로 잘 알려진 박열(작은 사진)이 오랫동안 옥고를 치른 지바형무소는 지금도 교도소로 이용되고 있다.
박열은 김약수 백무 최갑춘 황석우 정태성을 중심으로 고학생 동우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친목단체로부터 점차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이념단체로 발전하게 됐다. 그는 일본의 사회운동가이자 아나키즘의 지도자인 오스키 사카에, 이와사 사쿠타로 등과 교류하며 아나키즘에 빠져들었다. 이 무렵 박열은 평생의 동반자인 가네코 후미코를 만났다.

1923년 9월 박열은 일본인 애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왕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일왕을 비롯하여 왕족과 내각 총리, 조선총독 등을 폭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폭탄을 구하기 위하여 중국 상하이로 동지 김중한을 파송하려다 발각됐다.

이 사건으로 1926년 2월 일본 최고재판소인 대심원은 두 사람에게 ‘대역죄’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박열은 대심원 판결을 받은 후 이치가야에서 지바 교도소로 이감됐다. 그는 광복으로 1945년 10월 27일 석방됐다. 이로써 두 사람은 22년2개월 동안이나 수감생활을 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차 공판 후 교도소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박열은 사모관대, 가네코 후미코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쪽머리를 했다.

긴 옥살이에서 벗어난 박열은 1946년 10월 재일조선거류민단을 창단해 3년간 단장을 지냈다. 이듬해 귀국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임명됐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28일 서울에서 납북됐다. 그리고 1974년 7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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