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말이면 등장하는 현상이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 근무했던 A씨 이력은 놀랍다. 김대중 후보 측에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정권교체에도 자리를 지켰는데, 김대중정부 끝날 무렵에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쪽에 줄을 댔다고 한다. 그런데도 노무현정부 시절 줄타기에 성공해 고위직까지 올랐다. 그는 지금 새누리당 의원이다. 출신 지역, 학교, 소속 기관 출신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관행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박근혜정부에선 최순실 같은 비선실세를 잡느냐가 공무원들의 관운을 갈랐다.
황정미 논설위원 |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국정은 올스톱이나 마찬가지다. 반사이익을 가장 많이 누린 더불어민주당 측은 벌써부터 ‘벚꽃 선거’ 타령이다. 촛불민심을 내세워 헌법재판소에 탄핵심판 결정을 서두르라고 압박한다. 정치권만 들썩이는 게 아니다.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는 거야의 입김에 취약하고 다음 대선이 수개월 앞당겨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촉’을 세운 공무원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는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 측에 줄 서는 공무원들이 등장했다.
문 전 대표는 11일 “국가대청소가 필요하다”며 6대 청산 과제를 밝혔다. 비리·부패 공범자, 권력기관의 공범들을 색출·청산하자는 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부자’의 조력이 필요하다. 이미 이런저런 개혁 보고서를 들고 문 전 대표 측을 찾는 이들이 있다는 전언이다. 문 전 대표의 ‘국가대청소’ 선언은 공직사회를 향한 건지도 모른다. ‘박근혜·최순실 부역자’를 색출해내라는. 대청소를 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은 반대급부를 챙길 것이다. 개중에는 정말 개혁이 필요하다는 충정파도 있겠지만 그게 정치권에 줄 대는 명분이 될 순 없다.
흔히 ‘영혼없는 공무원’이란 표현을 쓴다. 세종시는 탄핵 사태로 인사가 지연되는 걸 오히려 반기고, 웬만한 일은 다음 정권으로 넘기자는 분위기란다. 모든 공무원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손 놓고 있는 이들이 꽤 된다는 얘기다. 꼬박꼬박 세금 내는 국민들로서는 가슴이 턱 막힌다. 힘 빠진 장관들이 기강을 잡는다고 먹힐 리 만무하다. 공무원들이 정권, 정치권 눈치를 봐야 하는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한 복지부동, 줄대기의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는다.
최순실이 4년간 공조직을 주무르는 동안 공직사회 ‘경보’는 작동하지 않았다. 초대 인사혁신처장을 지낸 이근면 전 처장은 “핵심은 인사 시스템”이라고 했다. 인사가 시스템적으로 운영되지 않으니 보은·정실 인사가 판치고 윗선 눈치만 보는 조직문화가 된다는 지적이다. 그는 공직사회 개혁을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에 빗댄 적이 있다. 공무원 집단에 정권은 5년마다 떠나는 과객이다. 어느 정부도 작심하고 ‘방울’을 달려 하지 않았다. 적당히 줄 세우고 이들의 ‘부역’을 즐겼다. 야당은 현 정부 사람들을 부역자라고 손가락질할 게 아니라 고장난 공직사회 시스템부터 고치겠다고 해야 한다. ‘국가개조’가 선거용 구호가 아니라면 말이다.
황정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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