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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백정기 의거’ 도모한 상하이 육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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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16 01:07:34 수정 : 2016-12-16 01: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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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 효창공원에는 ‘삼의사 묘역’이 있다.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를 모신 곳이다. 이곳에는 지난해 ‘다섯 그루 무궁화’를 주제로 김구·안중근·백정기·이봉창 의사의 무궁화가 식재돼 있다. 백정기 무궁화 앞에는 ‘모자 하나의 영토, 모자 하나의 대지, 모자 하나의 하늘’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백정기 의사(작은 사진) 등이 1933년 ‘육삼정 거사’를 도모했던 중국 상하이 탕구루 346호, 육삼정은 1943년 화재로 소실됐다.
독립기념관 제공
효창공원에 안장된 백정기(1896∼1934) 의사는 ‘친일 모리배 처단을 위해 총을 잡은 아나키스트’로 불린다. 그는 전북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는 등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어린 나이에도 백 의사는 나라를 위해 활동해야겠다며 1919년 2월 상경했다. 3·1운동이 임박할 무렵 독립만세운동을 하기 위해 급히 귀향하여 3개 마을을 누비면서 일제의 침략 사실을 알리고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그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다시 상경하여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일제 기관의 파괴·방화와 침략원흉의 처단, 보급로 차단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일본경찰에 알려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국외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지금의 단둥)에 도착했다. 그는 영국 국적의 조지 쇼(Gorge L. Show)의 도움으로 봉천(지금의 선양)으로 갔다. 이곳에서 이강훈을 만나 훗날 ‘육삼정 의거’의 동지로서 첫 인연을 맺었다. 1920년 베이징으로 건너간 백 의사는 신채효 등과 교류하며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아 이상적인 농촌사회 건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4년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하야카와(早川)수력 공사장의 대파괴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발각돼 고초를 겪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의사는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남화아나키스트연맹,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중심으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했다. 1932년 10월 백 의사는 정화암, 이달 등과 함께 밀고자로 지목되어 오던 주구 3명을 처단했다. 백 의사는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그 주구들을 찾아내 처단하도록 했다. 그리고 1933년 3월 17일 상하이 홍커우 육삼정에서 중국정부 요인 매수를 목적으로 연회를 개최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등을 처단하기 위해 도모했다. 거사가 발각되면서 백 의사는 채포돼 일본 나가사키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4년 순국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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