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화한인청년연맹의 백정기 의사(작은 사진) 등이 1933년 ‘육삼정 거사’를 도모했던 중국 상하이 탕구루 346호, 육삼정은 1943년 화재로 소실됐다. 독립기념관 제공 |
그는 국외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지금의 단둥)에 도착했다. 그는 영국 국적의 조지 쇼(Gorge L. Show)의 도움으로 봉천(지금의 선양)으로 갔다. 이곳에서 이강훈을 만나 훗날 ‘육삼정 의거’의 동지로서 첫 인연을 맺었다. 1920년 베이징으로 건너간 백 의사는 신채효 등과 교류하며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아 이상적인 농촌사회 건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4년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하야카와(早川)수력 공사장의 대파괴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발각돼 고초를 겪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의사는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남화아나키스트연맹,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중심으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했다. 1932년 10월 백 의사는 정화암, 이달 등과 함께 밀고자로 지목되어 오던 주구 3명을 처단했다. 백 의사는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그 주구들을 찾아내 처단하도록 했다. 그리고 1933년 3월 17일 상하이 홍커우 육삼정에서 중국정부 요인 매수를 목적으로 연회를 개최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등을 처단하기 위해 도모했다. 거사가 발각되면서 백 의사는 채포돼 일본 나가사키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4년 순국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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