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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미의 엄마도 처음이야] <37> 아이와 나누고 싶은, 나를 울게 한 '문화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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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17 14:01:40 수정 : 2016-12-17 14: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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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내게 큰 충격을 준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벼락처럼 나를 내리쳤고 아프게 상황을 깨닫게 했다. 나는 청소년기에 한번쯤 접하게 되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구절을 대학 진학 전까지는 공감하지 못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유명 문구다. 아리송하게만 느껴졌다.

대학에 진학한 뒤 처음으로 다른 부류의 친구들을 만나면서 내 세계가 흔들렸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주위의 풍경이 대동소이했다. 세상을 수직으로 세워 그 안에서 나의 좌표를 찍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들의 부모님은 적당히 가난했고 먹고사는 일에 전념하느라 바빴다. 자녀 교육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공부 좀 해라, 너 커서 뭐 될래?”라는 질책으로 표현할 뿐이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앎을 넓히는데 관심이 많아 그 품에서 배움의 열정을 키웠던 친구가 내 주변에는 없었다. “엄마, 아빠도 공부를 싫어했으면서 왜 나한테 잔소리 하는 거야?”라며 반항하는 경우가 흔했다. 친구들 다수는 목표 없이 지냈다. 수도권에 그런 곳이 어디있겠냐 싶겠지만 1990년대까지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논밭 한가운데에 있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달랐다. 외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나온 해외파가 있었고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한 친구들이 많았다. 부모 모두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고위직에 있는 배경의 친구들을 보며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애들도 있구나’라고 처음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보지 못한 유형이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어느 날 깨닫고 보니 1000원을 아끼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일의 서글픔과 소박함의 정서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내 곁에 있었다. 각자 사는 곳은 멀었지만 친구의 동네는 내가 사는 곳과 다르지 않았다. 동질감과 애틋함, 고마움을 느꼈다. 방학이면 주변 친구들이 해외로 배낭 여행을 떠날 때 우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학기 중에도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방학에는 갯수가 늘어나 둘 다 더욱 바빴다. 비오는 날의 감상, 첫사랑의 서글픔, 택시비를 아껴야 하는 이유 등 일상 이야기를 공유하며 위안을 얻었다. 서로를 다독이며 대학에서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가끔씩 주변과의 격차로 인한 박탈감과 열등감이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신문방송학과 학생이었는데 같은 과 애들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겉치장만을 놓고 봐도 훨씬 수수한 국문과 수업에 집중하며 인생에서 처음으로 소설책에 머리를 처박았다. 문학 소녀와는 거리가 멀었던 내게 이 때의 소설은 없는, 부족한, 서글픈, 버림 받은, 뒤처진, 가난한, 손가락질 받는 이들을 쓰다듬어주는 위로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전공 수업에서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을 만났다. 이 단어는 내 안의 순수의 안개를 걷어내고 희미했던 의식에 철퍼덕 따귀를 날렸다. 정신이 확 깨면서 요즘 유행어로 말하자면 나의 ‘흙수저 인생’을 깨달았다.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이 단어를 만나기 전까지는 명료하게 규정짓지 못했다. 아직은 덜 깨어진 유년의 힘, 무지몽매의 편안함이 나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문화자본은 내가 붙잡고 싶은 빛이기도, 나의 처지를 깨닫게 한 어둠이기도 했다.
등록금 마련에 허덕이던 어느 날, 한 교수의 무신경한 발언과 함께 이전까지 나를 채웠던 세계는 완전히 깨졌다. 복지 장학금을 신청하려면 가계 형편을 구구절절히 적고 전공 교수의 서명을 받아야 했다. 이런 절차를 밟기가 정말 싫었지만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몇백만원을 아낄 수 있었다. 어렵게 찾아간 교수는 “내가 너를 잘 모르지만 그래도 여기에 사인해야겠지?”라고 무신경하게 말했다. 나는 모욕감을 느꼈다. 13년 전 일인데도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교수는 가볍게 사인을 했다. 교수의 방에서 나온 뒤 학교 화장실에 숨어 엉엉 울었다.

나는 상처 받았고 같은 일로는 다시는 상처 받지 않았다.

문화자본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장한 개념으로 ‘사회적으로 물려받은 계급적 배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화적 취향’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부모의 취향을 공유하고 부모의 지위를 선망하며 자란 아이들은 부모가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지적인 욕구를 갖게 되는 것이다.

돈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 바탕 없이는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경제력과 문화적 수준, 자녀와의 소통 시간이 어우러져야 대를 잇게 된다. 최근 국정농단이 드러난 비선 실세에게 없었던 것도 문화자본이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내적 열망이 자녀에게 자연스럽게 흘렀다면 돈과 권력을 이용한 불법을 자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내 주변에서 나를 포함해 문화자본의 혜택을 누린 친구는 없었다. 대학 동기들 중에는 많았다. 이들은 엄마, 아빠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 현상에 관심을 갖고 안목을 키웠다. 해외를 경험하며 식견을 넓혔다. ‘나도 부모님만큼은 이뤄야 한다’는 열망을 갖고 스스로 공부를 했다. 이 용어는 수도권 변두리의, 한겨울이면 방풍지를 덕지덕지 붙이는 허름한 주택들이 모인 나의 학창 시절 동네의 사회적 위치를 단단한 실체로 깨닫게 했다.

그때부터 나는 ‘아이를 낳게 되면 문화자본이 있는 부모가 되고 싶다’고 열망하게 됐다. 이것이 계급사회, 경쟁사회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경쟁하려는 것 같아 꺼려지면서도, 아이와 먹고 자고 노는 것 외에 사회문화적 취향까지 공유하려는 마음으로 다가오며 설레기도 했다. 누군가 나를 향해 체제 옹호론자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아이와 많은 걸 함께해야지’라는 마음으로 그 단어를 가슴에 품고 있다. 부모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풍파를 겪을 테고 깨질 테지만, 나와 같은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말이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사진=게티이미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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