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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민족사 전환점 된 정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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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04 01:20:26 수정 : 2017-01-04 0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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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대한제국 선포 역사적 전기 / 교훈 되새기며 미래 향한 지혜 찾아야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2016년 병신년 한 해가 저물고, 2017년 정유년의 새해가 밝았다. 역사 속에서도 정유년에는 큰 사건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420년 전에 일어난 정유재란과, 120년 전인 1897년에 단행된 대한제국의 선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명나라 군대까지 참전하면서 국제전으로 확산됐다. 이후 전쟁은 장기전의 양상을 띠었고, 명나라와 일본이 주도하는 강화회담이 열렸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1월 조선을 다시 침략해왔다. 420년 전에는 새해 벽두부터 전쟁으로 나라가 극히 혼란했던 것이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 7월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를 당했으나, 이순신은 남은 군선들을 수습해, 10배나 넘는 일본군을 무찌르는 대승을 거둔다. 이것이 영화로도 잘 알려진 1597년 9월의 명량대첩이었다.

1657년의 정유년 또한 효종이 북벌(北伐) 정책을 추진하면서 온 나라가 전쟁의 긴장감에 휩쓸렸다. 1717년의 숙종 시대를 거쳐, 1777년 정유년은 정조가 즉위한 지 두 번째 되던 해로 정치, 경제, 문화의 개혁정치들이 준비되던 시기였다. 1837년 정유년은 1834년 8세의 나이로 즉위한 헌종이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세도정치의 압박 속에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백성의 삶은 불안해졌다.

120년 전 정유년에는 조선의 왕이 황제가 되고 국호가 바뀌는 큰 변화가 있었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후 이곳에서 1년여 동안 머물던 고종은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구본신참(舊本新參·옛것을 근본으로 새것을 참작함)’에 입각, 근대국가 수립에 필요한 기구를 설치해 나갔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며 자주국의 면모를 과시해 나갔다. 10월 12일에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이미 건설해 놓은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의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는데, 왕과 황제의 위상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은 왕은 홍룡포, 황제는 황룡포를 입고, 왕은 토지와 곡식의 신인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지만, 황제는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점이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한 것은 삼한(三韓)의 옛 영토와 역사를 계승하는 ‘큰 한(韓)’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과 기자 이후로 강토가 분리돼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 때에 마한, 진한, 변한을 통합했으니, 이것이 ‘삼한’을 통합한 것이다”라고 한 고종의 발언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한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때 정한 ‘대한’이라는 국호는 공화정 체제로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쳐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1957년의 정유년은 6·25전쟁의 폐허와 상처를 극복해 가면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전개했던 시기로, 불과 60년 전이지만 이렇게 어려운 때를 겪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시 모습은 먼 과거의 파노라마 영상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정유년의 역사들을 되새겨 보면서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설계하는 지혜를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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