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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의월요일에읽는시] 고동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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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09 00:49:49 수정 : 2017-01-09 00:4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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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랑(1958~)

길을 허무는 방식으로 고동은 나를 허문다

( …… )

뒤엉켜 있는 길은 누가 누구를 의심했다는 증거, 너희가
무작정 떠난 수렁을 나도 따라가 보는데
때론 깊은 수렁이 교직되어 있더라도 그곳을 걸어보지 않고선
그것이 길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그런 길에 우연찮게 서 있을 수도 있는 일
거기에서 한 끼의 식사를 때우고 잠시 멈춰
스스로의 발자취를 지우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면서
나선螺線의 길을 내면으로 소실점까지 뚫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

수렁이 여전히 질척질척한 속도로 길을 붙들고 있다
그도 고집스럽게 느릿느릿한 걸음으로도
누군가의 빛나는 길잡이가 되었지만
그런 장소의 처음에서 보면
온몸을 바닥에 붙이고 먼 길 가고 있는
고동의 종족種族들이 보인다

굴곡의 삶을 거느리고 출렁이는 바다는
고동의 부력으로 지상의 딱딱한 길까지도 자유롭게 한다


글의 위대성은 비유에 있고, 비유의 위대함은 내용의 함축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경전(經典)이 문학적으로 추앙을 받는 이유도 바로 이 훌륭한 비유의 글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하물며 함축적인 글을 지향하는 시에서 비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김영남 시인
인용시 ‘고동의 길’에서는 한 문장 한 문장 구사하는 비유가 유별나다. 다리가 없는, 온 몸이 다리인 고동의 종족(種族)들 삶을 비유하고 성찰한다. 그 깊이와 폭이 넓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우리들 안일한 삶도 뒤돌아보게 한다.

이런 시는 가슴에 의미가 새겨질 때까지 여러 번 읽어보는 게 최고의 감상법이 아닐까 싶다.

김영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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